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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려면 어떠랴 ­- 정년 유감
아무려면 어떠랴 ­- 정년 유감
  • 손형섭 목포대 명예교수
  • 승인 2018.05.2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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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손형섭 목포대 명예교수·경제학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정년을 맞았다. 직장 생활 41년을 마무리했다. 길다면 참으로 기나긴 세월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정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후배들에게 직장을 물려주고 한가롭게 쉬면서 남은 삶을 정리하라는 것은 아닐까? 나보다 먼저 정년을 맞았던 친구들을 만나보면, 정년을 몹시 아쉬워한 친구들도 있었고, 매우 홀가분하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정말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정년을 맞이하면서 삶의 모든 것을 단순화하기 위해 서재에 쌓여 있던 2천여권의 책을 한 권도 남김없이 모두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졌던 30여개의 모임도 10개 정도로 줄였다. 그동안 즐겼던 테니스 라켓도 배드민턴 라켓도 모두 손자들에게 물려줬다. 그뿐만 아니라 옷가지도 봄옷, 겨울옷 두세 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옷 수거함에 넣어버렸다. 

또한 아끼던 박사 학위복도 장교복도 옷 수거함에 넣었다. 그래서 장롱 속 옷걸이만으로도 수납공간이 충분했다. 그리고 통장도 하나로, 카드도 하나로 단순화했다. 그래서 정년이 되니 모든 것이 홀가분하고 한가로웠다. 대학에서 정년을 맞이하게 되면, 보통 이삼 년 동안 후임 교수가 임명될 때까지 본인 강의 과목을 강의하는 것이 관례여서 나도 명예교수로 1년 동안만 강의했다. 대학 강의 중에서 석사과정이나 박사과정 대학원생들보다 학사과정의 신입생들만의 강의를 맡았다. 신입생들은 신기한 눈빛으로 진지하게 강의를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날을 회고해 보면, 나는 변화의 격변기에서 살아왔다. 일제로부터 민족해방을 맞이했고, 해방 후 미 군정 시절의 정치적, 사회적 격동기를 보았으며, 대한민국의 건국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를 겪었고, 4.19학생 의거와 5.18광주민중항쟁을 겪었다. 또한 50년대 빈곤의 삶도 겪었고, 90년대 풍요로운 삶의 모습도 보았으며, 최근 들어 사회적 문명의 전환기도 몸소 체험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얻은 것도 많았고, 잃은 것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니 별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혼자서 만족하고 있는 열권의 낡은 전공 저서들이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제 정년을 맞이하고 보니 그간 읽고 싶었던 책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고, 그동안 자주 보고 싶었던 친구들도 자유롭게 만나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여유도 가지게 됐다. 요즈음 공원을 자주 산책하는 것이 하루의 일상이 되고 있다. 바쁜 생활도 없다. 잠도 좀 늦게 자도 되고 늦게 일어나도 된다. 하루가 내 마음대로다. 방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고, 잠에서 깨어나면 산책하는 것이 오늘 나의 삶이다. 바쁠 일도 쫓길 일도 없다. 모든 삶이 여유로운 자유다. 

아무려면 어떠랴. 가볍게 떠나고 싶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떠나는 뒷모습에 달려 있지 않을까. 만날 때가 있으면 떠날 때가 있고, 박수받으며 오를 때가 있으면 무관심과 소외의 대상이 되어 내려올 때도 있을 것이다. 때가 되어 낡아지면 제자리를 물려주고 퇴진하는 것이 반드시 서글픈 일은 아니다. 늙은 것이 추한 것은 더욱 아니다. 추하게 느끼는 감정이 있다면 그 감정이 추한 것이다. 경륜은 오히려 고귀하고 값진 것이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도 아름답지만 서서히 지는 꽃도 아름다운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그간 살아온 삶이 아름답다면 내일의 삶도 아름다울 것이다. 그래서 정년 후의 삶도 또한 아름다우리라. 

가끔 서울에 살고 있는 자녀들을 방문할 때면, 아침 출근이 마치 전쟁터와 같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손자들을 깨워서 학교에 보내야 하고, 자녀들도 출근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지난 41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회상에 잠기곤 한다. 나도 아침 7시 교수 통근 버스를 타야 대학에서 1교시 강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년 후부터는 삶의 자유인이 되었고, 새로운 삶을 충전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래서 정년 후 『성서경제학』, 『추억』 등 열권의 책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고, 올해는 『별빛』 詩집도 발간하게 됐다. 따라서 정년은 나의 새로운 삶의 변화이자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 하겠다.

 

손형섭 목포대 명예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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