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2:30 (토)
시간강사, 끝내 죽음으로
시간강사, 끝내 죽음으로
  • 허영수 기자
  • 승인 2003.06.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느 시간강사의 '죽음'이 던진 파장

촉망받던 서울대의 한 시간 강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관악경찰서는 지난 달 30일 서울 관악구 캠퍼스 내 야산에서 서울대 시간강사 백 아무개씨(34)가 소나무에 목을 매고 숨진 채로 발견됐다고 밝혔다. 백씨가 실종된지 10여일 만의 일이다. 관악경찰서는 백씨의 컴퓨터에서 "가족들과 팀원들에게 끝까지 배신감과 절망감을 안겨준다…아무도 날 기억하지 않기 바란다"라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됨에 따라 백씨의 죽음을 자살로 보고, 수사를 종결지은 상태다.


그러나 시간강사의 경제적 어려움과 학문후속세대의 좌절당한 '학문에의 열정'을 읽을 수 있는 백씨의 유서는 그동안 말만 무성했던 시간강사의 처우 개선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사 3면>


자신을 '상자속의 사나이'로 표현한 백씨는 유서에서 "경제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일만 했다…제일 급한 일은 카드대금을 정리하는 것이고, 월말엔 대출금 이자도 정리해야 한다"라며 시간강사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질적인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아내와의 사이에 7살바기 딸을 둔 백씨는 지난 2001년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울대에서 시간강사와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강사료 월 40만원과 연구소에서 주는 월 1백50만원의 급여로 생활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시간강사의 '생활고'가 학문후속세대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백씨의 죽음을 경제적인 측면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낮은 강사료 뿐 아니라, 60%에 달하는 교육의 시간강사 의존율, 턱없이 좁은 교수임용 관문, 단기 계약에 그치는 학술지원책, 학연과 지연으로 얽힌 폐쇄적인 교수 사회 등이 학문후속세대의 원활한 양성을 어렵게 하고, 전문 연구 능력을 저하시키고 있다는 주장이다.


백씨와 함께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던 한 동료 시간강사는 "물질적인 면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더라도, 독자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이 조성돼 있었다면, 한 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문에의 열정을 접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뚜렷한 해결책이 있지도 않은 상황이 빚어낸 '비극'이라는 것. 시간 강사 문제는 단순히 강사료를 인상하는 방식으로 단기간에 해결될 수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또 김문황 충북대 교수(노어노문학과)는 체홉의 단편소설을 설명하면서 "세상을 거부한, 혹은 세상이 거부한 '상자속의 사나이'와 시간강사로서 막다른 길을 가고 있는 듯한 자신을 동일시시킨 듯 하다"며 학문적 동료였던 한 시간강사의 때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한편, 변상출 한국비정규직교수노동조합 위원장은 "일부 언론에서는 백씨의 자살을 개인의 임용좌절과 우울증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수년동안의 불평등 고용구조로 인한 희생으로 봐야 한다"라면서 "어느 직종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급여가 10배 이상 차이나는 곳이 없다"라며 시간강사에 대한 시급한 처우 개선책 마련을 주문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