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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에 휘둘리고 ‘인정’ 욕망에 바랜 학자의 명예
상술에 휘둘리고 ‘인정’ 욕망에 바랜 학자의 명예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3.05.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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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쟁점 : 세계 인명사전 ‘등재’어떻게 볼 것인가

지난해 이정호 서울대 교수(영문학)는 마르퀴스사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당신의 영문 이력서를 보내주면 이를 평가해 등재 심사를 하겠다”라는 내용이고, 이 교수는 좋은 의도라 판단, 흔쾌히 영문 이력서를 보냈다. 몇 달 뒤 등재가 됐다는 사실을 통보하면서 이 인명록을 주문하면 가격을 할인해 주겠다는 내용의 메일을 받았다. 이 교수는 순간 이것이 장삿속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후에는 다시 답변을 보내지 않았다.

해마다 이무렵 언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기사 가운데 하나가 ‘국제적인 인명사전’에 등재된 학자들의 소식이다. 최근 2~3년간 부쩍 이공계열과 의학계열 연구자들의 등재 소식이 잦아졌다. 국내 학계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니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세계적인’ 인명사전에 등재됐다는 것이 세계적인 학자임을 보증할 수 있는 것일까, 의혹의 눈초리도 만만치 않다.

검증되지 않은 ‘인명사전’의 객관성

현재 국내 언론에서 자주 거론되는 인명사전의 종류는 대략 세 가지 정도. 미국 마르퀴스사의 ‘후즈후’와  미국 인명정보기관인 ABI, 영국의 인명기관 케임브리지 IBC에 발간하는 인명사전이 대표적으로 가장 공신력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르퀴스사의 ‘후즈후’는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명사전이다. 이 회사는 매년 ‘후즈후 인더월드’를 비롯해 ‘후즈후 사이언스 앤드 엔지니어링’, ‘후즈후 어메리카 히스토리’ 등 20개의 카테고리 안에서 인물을 선정한다. 후즈후 인더월드가 광범위한 분야에서 인물을 선정한 것이라면, ‘후즈후 어메리카 히스토리’ 등 다른 19개 분야는 과학, 공학, 여성, 미국 역사 등 한층 전문적인 영역에서 인물을 골라낸다. 후즈후 인더월드에 실린 인명 수는 약 5만명이며, 현재 마르퀴스사가 보유하고 있는 인물 데이터베이스는 1백만명에 달한다. 

그러나 이 같은 인명사전의 객관성은 검증되지 않았다. 오세정 서울대 교수(물리학)는 “인명사전의 등재 기준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라고 말한다. 인명사전에 실렸다고 해서 인지도가 높고, 실리지 않았다고 해서 유명하지 않다는 기준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평가행위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다.

ㅅ 대의 이 아무개 교수는 “인명사전 편찬 회사에서 심사를 위한 이력서를 작성해 보내라는 메일을 보고 장난기가 발동했다”라며 경험담을 전했다. 이 교수가 보낸 것은 이름과 학력, 현재의 직장뿐이었다. 전공과 관련한 연구성과는 하나도 적지 않고, 저술과 관련한 수상경력 하나만을 적어 보냈는데, 등재 결정을 했다는 메일을 받았다는 것. 객관적인 평가라는 말도 우스웠고, 결과도 씁쓸하기도 했던 경험이었다.

ㅈ 대의 김 아무개 교수는 “인명 등재를 미끼로 책을 팔려고하는 몇몇 회사의 얄팍한 상술에 지나지않다”라며 학계와 언론이 상술에 휘둘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후즈후’의 경우 권당 3백불이 넘는 다소 비싼 책이지만, 자기 이름이 실려 있다는 ‘명예’를 생각한다면 구매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는 것. 그러나 반대로 5만명의 인물 중 10%만 사전을 구매해도 엄청난 수익이 마르퀴스사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물론 이것이 강매는 아니다. 그러나 꽤 여러 번 구매 신청서가 날아오고, 다소 인지도가 떨어지는 회사일수록 집요하게 구매를 요구한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설명이다.

결국 인명사전 등재는 기록된 자들만이 자축하는 잔치는 아닐까. 학계의 사정에 어두운 일반인을 대상으로 자기과시를 했다는 생각도 든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화학)는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무책임하게 유포한 언론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라며 언론의 선정성에도 일침을 던졌다.

명예 담보한 얼룩진 自祝

인명사전은 분명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다른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보기 위한 데이터베이스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는 기록이지만 점점 더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고 해서 연구자들이 실제적으로 얻는 이익은 없다. 학자로서의 ‘명예’, 자긍심이 고양될 수 있지만, ‘선정’ 절차의 객관성 검증이라는 부분이 괄호에 묶여있기 때문에 좀 찜찜하다. ‘세계적 인정’이라는 수사뒤에 ‘상술’의 혀가 도사려 있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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