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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마의태자·동학교도의 마음 흐르는 合江의 넉넉한 생명력
경순왕·마의태자·동학교도의 마음 흐르는 合江의 넉넉한 생명력
  •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연구단
  • 승인 2018.04.0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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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 10. 갑둔리오층석탑·동경대전 간행터·인제향교·합강정·중앙단·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인제, 경순왕과 마의태자에 대한 기억

麻衣太子를 기억하는가. 극도로 혼란했던 후삼국시기, 왕건이 이끄는 고려가 패권을 거머쥐자 신라의 경순왕은 결국 항복하기로 결심한다. 망국의 불운한 왕자인 마의태자는 아버지 경순왕의 이러한 결정을 목숨이 다할 때까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삼국사기』는 그가 삼베옷을 입고 금강산에 들어가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생을 마감했다고 전한다. 

이런 마의태자의 전설이 담긴 장소는 하나의 길로 연결될 수 있을 만큼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데, 강원도 인제군 남면 갑둔리도 그런 곳들 중 한 곳이다. 진 칠 둔(屯)자를 사용하는 갑둔리에는 예로부터 ‘항병골’, ‘군량리’ 등 군사 주둔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았다. 이러한 땅 이름들은 마의태자가 이곳에 은거하며 군사를 모아 신라의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려 했다는 유래와 연결된다. 또한 ‘김부리’처럼 경순왕이나 마의태자와 연관된 다른 지명들도 함께 전해지는 것을 보면 이곳이 신라 말기의 역사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갑둔리5층석탑

 

한적한 도로변 숲 속에 홀로 자리한 ‘갑둔리오층석탑’은 ‘김부오층석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탑의 기단에 적힌 발원문에 ‘金富’라는 글귀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경순왕을 ‘金傅大王’이라 칭하는데 이 갑둔리에서는 김부대왕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한자는 다르더라도 같은 발음의 ‘김부’가 곧 김부대왕을 의미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가 크게 나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경순왕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시각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신라의 상황에 절망해 고려에 껍데기만 남은 나라를 ‘갖다 바쳤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쪽으로는 왕으로서 남은 백성들이 戰禍 속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막고자 눈물을 흘리며 고려에 항복했다는 평가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에 대한 신라의 항복을 절절히 반대하는 마의태자와 그를 설득하는 경순왕의 대화가 실려 있다. 이때 경순왕이 항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든 것은 ’백성‘이다. 

“작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가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의 간과 腦漿이 땅에 쏟아지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언뜻 보면 이러한 선택은 경순왕 자신의 정치적 安位를 지키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어 보인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천년왕국’을 자기 손으로 직접 마감할지언정 남은 백성이라도 살리기 위한 왕의 부득이한 선택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에 비해 마의태자는 끝까지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후백제의 견훤의 침략에 의해 이미 피폐해지고 몰락한 신라의 왕권은 경주 코앞까지 와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고려의 왕건 앞에 너무 무기력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저항을 한다는 것은 그저 무모한 선택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전하는 마의태자의 최후가 사실이라면 경순왕과 다른 방향에서 그도 백성을 염두에 뒀을 수 있다. 나라를 잃고 비참한 생활을 감수하며 흩어져야 될 사람들의 처지를 예상하면 순순히 항복을 선택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과연 그 당시 지배층에게 民은 어떤 존재였을까.

‘김부대왕’은 경순왕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맥락에 따라 마의태자를 지칭하는 단어가 되기도 한다. 갑둔리에 머물렀다는 마의태자 이야기는 마의태자를 곧 김부대왕으로 인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물론 학계에서는 인제에 전해지는 마의태자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마의태자는 진짜 마의태자가 아닐 것이라 보는 상반된 견해도 존재한다. 어찌됐든 확실한 것은 이 산골 사람들이 마의태자의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계속 전했다는 점이다. 대세를 거스르지 않고 신라 왕실의 안위를 보존하고자 항복을 선택했던 경순왕이든, 다른 방식으로 신라를 지키고 싶었기에 강력한 적국의 압력을 거스르고자 했던 마의태자든 그들 모두 민초들의 가슴을 애달프게 하지 않았을까. 

인제를 여행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곳의 마의태자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이 기억 속에서 경순왕과 마의태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한 망국의 왕족으로 재현됐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천여 년 동안 인제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소망을 빗대어 풀고 후대에 다시 이야기를 전했다. 민초들의 마음은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실체화되고 조선 시대를 거치며 지명으로 새겨져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전해졌다. 역사가 층층이 쌓여 이야기로 전해지고 그것은 다시 땅 이름이 돼 굳어진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깃들어 만들어진 오래된 것은 생명력이 강하다.

동경대전 간행터,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평안케 하고자 일어난 마음들 

▲동경대전 간행터

갑둔리 351번지, 375번지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동경대전간행터’는 2016년 12월 2일 강원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 그런데 직접 찾아가 보면 아직 기념장소로서의 가치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지도상으론 위치가 맞지만 아무리 둘러 봐도 도로 옆 빈 터엔 우거진 수풀 밖에 보이지 않는다. 주거지와도 멀리 떨어져 지금은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곳이다. 흔한 표지판이나 팻말 하나 보이지 않고 보호 시설 같은 것도 없지만, 차오르는 아쉬움에 괜히 허망하게 풀숲을 뒤져 본다. 다시 차로 돌아와 예전엔 깊은 산골마을이었을 이곳에 모였을 동학교도들의 서로 존중하는 공동체를 상상해보았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그들의 작은 마음들이 합쳐지고 이어져 인제의 합강 만큼이나 뚜렷한 역사의 물줄기를 만들어냈으리라. 

『東經大全』은 동학의 교조 수운 최제우가 지은 東學의 경전이다. 1860년 최제우가 제창한 종교적 성격의 융합적 사상인 동학은 ‘廣濟蒼生 布德天下’, 즉 고통에 찬 삶을 사는 백성을 널리 구하고 이 뜻을 널리 펼치고자 했다. 

동학이 창도되던 당시 조선 후기는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해 보일만큼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사회적 불안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지배층의 정치는 부정이 심했고 三政은 문란해 수탈은 가혹했으며 외세의 침입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한 시기에 수운은 고통 받던 백성들이 보다 편안히 살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수도했고 자신의 깨달음을 널리 알렸다. 동학의 새로운 세계관과 사람에 대한 존중은 지치고 아픈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줬다. 함께 평안하게 잘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들은 수운이 처형당한 뒤 동학에 대한 극심한 탄압을 피해 이 강원도 산골 마을까지도 모여 들었다.

전통적 질서와 권위에 저항해서라도 나라에 팽배한 부조리와 모순을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했던 동학의 정신은 포교 초기부터 국가의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갑둔리로 옮겨 온 한 무리의 동학교도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포교 활동을 이어가려고 고군분투 했으리라. 그들은 충분하지 않은 정보와 물자 속에서도 수운의 가르침과 사상을 모아 갑둔리판 『동경대전』을 발간했다. 하늘과 사람을 같이 보고 민중본위의 가르침을 전파한 동학은 한반도의 자생적 근대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1894년 비록 정부가 불러들인 일본군의 기관총 앞에 무참히 꺾여 버렸지만, 갑오농민혁명의 반봉건 반외세 투쟁은 분명 동학이라는 사상적 토대에 큰 뿌리를 두고 있다. 갑둔리의 동경대전간행터는 아주 외진 곳이었지만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로 나아갈 작은 샘이 흐르기 시작하던 곳이었다. 

인제향교와 합강정, 고난과 역경의 역사를 견뎌내다

‘인제향교’는 1610년에 처음 세워졌고 1615년과 1804년에 각각 서쪽과 동쪽으로 옮겨졌다. 1930년에는 대홍수가 일어 수해를 당했고 인제군청 인근인 현재 위치로는 1934년에 이전되었다. 이후에도 인제향교의 수난은 그치지 않았다. 한국전쟁으로 대성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고 휴전 이후인 1954년에 다시 명륜당이 세워졌다. 1966년 대대적인 보수를 거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인제향교

향교는 국가에서 지방민의 교화와 유가의 현인들에 대한 配享을 위해 세워진 곳이다.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이 지방 교육기관에 모인 사람들은 선학(先學)의 발걸음을 본받아 나라와 사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지식을 갈고 닦으며 전심을 쏟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면서 지방의 많은 향교들은 철거되고 소실됐다. 향교가 국가에 의해 다시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산업화가 가속화되던 1960~70년대였다. 20세기 후반에 부활했던 향교들은 ‘조국의 근대화’라는 ‘역사적 사명’에 국민들이 복무하도록 계도하고 국가에 대한 忠을 강조하기 위한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향교는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단지 각 지역의 예절교육 기관이나 전통문화의 흔적을 보여주는 곳으로만 머물러야 할까. 다시 거기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역민들의 어떤 마음들이 스쳐 지나고 또 모여들 수 있을까. 바삐 흘러가는 바깥 세상의 흐름과 달리 향교 앞마당은 늘 고즈넉하게 계절이 바뀐다.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인 ‘인북천’과 ‘내린천’ 두 江이 만나 합쳐져(合) 흐르는 곳이라는 의미인 ‘합강’. 그 통합의 물줄기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절경 위에 세워진 ‘합강정’의 내력이나 내포된 의미도 인제향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제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정자이지만 합강정은 합강의 고요한 흐름과는 달리 헐리고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1676년에 최초로 지어진 합강정은 소실되었다가 1756년에 중수됐다. 다시 지어진 정자는 200년을 채우지 못하고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소실됐다. 세 번째 합강정은 터만 있던 곳에 콘크리트 누각으로 세워진 1971년생이었다. 이 새로운 합강정도 오래 가지 못하고 1996년 국도 확장공사 당시 길을 내기 위해 철거됐다가, 오늘날의 합강정은 1998년 현재 자리에 목조 2층 누각으로 복원된 것이다.

이처럼 인제 합강정은 이 땅에서 살아간 사람들처럼 고난과 역경을 버티며 비록 그 모습은 계속 바뀌었지만 그 이름만은 유유히 이어지고 있다. 합강의 변하지 않는 흐름처럼 1676년의 합강정은 1998년의 합강정과 함께 서 있다. 누각에 올라서서 도도히 흐르는 강을 보고 있노라면 서로 다른 두 줄기의 물길이 합쳐져 더 큰 물줄기로 흐르는 그 평범한 자연의 모습도 위대하게 보인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덥어버리거나 덮여지지 않고 서로 만나 더 큰 하나를 이루는 풍경은 DMZ가 지척인 접경지역 인제에서 더 시원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중앙단,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모인 곳

합강정 바로 옆에는 ‘중앙단’이라고 불리는 제단이 조성돼 있다. 조선시대 각 도에 창궐하던 전염병이나 국가적 재난인 가뭄을 막기 위해, 또 억울하게 죽거나 제사를 받지 못하는 신을 모셔 厲祭를 지내기 위해 설치된 곳이다. 기록에 따르면 강원도의 중앙단은 옛 합강정 뒤편에 있었는데 당시 중앙단은 1910년경에 소실됐다가 2001년에 합강정의 위치에 맞춰 복원됐다. 귀신이 자유로이 오갈 수 있도록 사방으로 출입문을 낸 중앙단은 가운데 제를 올리는 제단이 있고, 그 제단으로 올라가는 계단 주위에 담장을 두른 형태이다. 

▲중앙단

그런데 사실 제사도 받지 못하는 신들은 크고 중요한 신이 아니라 雜神 축에나 속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유교 국가 조선에 그것도 지방 유학자들이 가르치고 배우는 향교 인근에 잡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국가적 제단이 마련된 것은 어찌된 일일까.

영조는 각 도의 중앙에 제단을 만들어 가뭄이 극심할 때나 심한 전염병이 돌 때 고을의 수령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 치수 대책이 미비했던 과거엔 가뭄이 들면 쉽게 해갈되기 어려웠고, 인간의 힘을 벗어난 곳에서 오는 것 같은 돌림병은 재앙 그 자체였다. 사람의 목숨이 전적으로 자연의 힘에 달린 상황에선, 유교 경전의 말씀을 따르고 통치이념을 수호하는 것보다 하늘의 여러 잡신들에게 제를 올려 엄습하는 재앙을 벗어나는 것이 더 긴요했다. 매년 10월이 되면 지금도 중앙단에선 ‘합강문화제’를 통해 이름 모를 신들에게 제사를 지낸다. 여행객들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하는 중앙단은 이처럼 무엇보다 사람들을 먼저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모여 들었던 곳이다.  

생명의 물줄기를 따라 모이는 사람의 마음

합강을 이루는 두 물줄기 중 인북천을 따라 올라가면 ‘한국DMZ평화생명동산’을 둘러볼 수 있다. 분단과 전쟁을 상징하던 DMZ에서 역사의 교훈을 배우고 가르치며, 평화를 확산하고자 만들어진 교육 및 체험 공간이다. DMZ가 가로지르는 땅인 인제의 상처를 딛고 한반도의 평화와 더 넓게는 세상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안식처 같은 곳이다. 그 상생의 화합은 단지 사람들 사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DMZ평화생명동산에선 전력과 난방에 태양열 및 지열을 사용하고 빗물과 생활용수를 순환 활용한다. DMZ에서 꿈꿀 수 있는 평화로 나아가는 길은 인간과 인간의 갈등을 넘어서는 것 일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포괄하는 생명의 나눔이기도 하다. 

▲한국DMZ생명평화동산

인제에는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이 포개져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큰 ‘하나’를 이루어갔던 곳들이 있다. 서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달랐지만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던 경순왕과 마의태자에 관한 사람들의 기억, 목판을 파고 종이로 찍으며 쉼 없이 수도했을 갑둔리의 동학교도들, 이념을 뛰어 넘어 생명을 먼저 생각하며 절을 올리던 중앙단. 그것들은 모두 서로를 일으켜주며 함께 살아가던 산골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들을 닮았다. 오늘도 대지를 적시며 합강으로 모여드는 작은 물줄기들은 생명력 넘치는 평화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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