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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인정 투쟁
‘을’의 인정 투쟁
  • 교수신문
  • 승인 2018.03.26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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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문성훈 편집기획위원/서울여대·현대철학

근대 민주주의가 개인적 자율과 집단적 자치라는 자기결정원칙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누구도 타인을 억압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율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타인의 행동을 억압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은 동시에 모든 인간이 평등함을 의미하며, 따라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들로 구성된 집단이라면 그 어떤 지배계층이 아니라 구성원 스스로에 의해 통치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말한다면, 이는 단지 독재 권력의 철폐만이 아니라, 자기결정원칙을 확립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분명 1987년 모든 국민이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행사하는 대통령 직선제가 관철된 것은 자치의 실현이라 할 수 있으며, 2017년 대통령 탄핵의 가결은 모든 국민이 그 누구에 의해서도 지배당할 수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주권자임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정치제도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을까? 정규직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에 고용보장, 그리고 노동삼권과 사회복지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는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 그리고 고용불안은 물론 노동삼권과 사회복지의 사각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가 아니라, 인건비 절감을 통해 이윤을 확대하는 생산 도구일 뿐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어느 재벌 2세는 땅콩을 봉지째 주었다고 비행기를 회항시키고 사무장과 승무원을 내리게 한다. 그리고 백화점 손님이 아르바이트생의 무릎을 꿇리고 뺨을 때리는가 하면, 기업주 대표는 경비원을 폭행하고, 장군 부인은 공관병에서 전자 팔찌를 채워 몸종처럼 부린다. 이른바 갑질이다.

갑이라는 말은 갑을관계를 명시하는 계약서상의 용어이지만, 계약직에 해당하는 비정규직이 사회 전체로 확대되어서일까, 갑은 어느덧 힘 있는 자를, 그리고 을은 이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약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갑이 업무나 역할 상 가진 권한이 업무 영역 밖에서도 타인의 인격 전체를 자신에게 예속시키고, 또한 지배하려는 全人的 권력으로 발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업무나 역할에 따른 권한이 전인적 권력으로 확장된다면 여기에는 한계가 없다. 누군가 이런 권력에 예속된다면, 이제 이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가 아니라 권력자의 목적달성이나 욕구충족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갑에 예속된 을은 갑의 이윤확대를 위한 생산 도구이고, 갑의 편익을 위한 봉사자이며, 급기야 갑의 성적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까지 추락한다. 

최근 '미투' 운동이 전 사회로 확대되면서, 그동안 크든 작든 자신의 권한을 전인적 권력으로 사용하면서 여성을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던 추악한 괴물들의 모습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관철 이후, 2017년에는 대통령을 탄핵할 정도로 성숙해왔지만,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민주화된 사회 속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가 아니라, 권력에 지배당하는 비인간화된 을의 모습을 보게 된다. 

기업주와 노동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건물주와 임차인, 교수와 학생, 감독과 배우, 상사와 부하직원, 선배와 후배. 이 모든 인간관계가 타인을 전인적으로 지배하려는 위계적 권력 관계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 간의 상호적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이제 을도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임을 인정받기 위한 ‘을의 인정투쟁’이 시작돼야 한다.

 

문성훈 편집기획위원/서울여대·현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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