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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시대에 번역가로 살아남기
인공지능시대에 번역가로 살아남기
  •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 승인 2018.03.12 1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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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연구논문을 쓰고 나면 영문초록을 작성하게 된다. 과거에는 불문학 전공자로서 문학 논문을 작성한 뒤 불문초록을 썼기 때문에 작문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교양교육이나 융복합 분야 논문을 쓰는 일이 생기면서 영작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됐다. 영문초록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동료교수들에게 물어보는 일이 왠지 체면이 손상되는 것 같아 대학원생에게 지나가는 말로 물은 적이 있다. 돌아온 말은 번역 업체에 맡기거나 인터넷 번역기로 돌린 뒤 조금 교정을 본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방법이 더 솔깃했다. 정말 가능할까 싶어 국문초록을 인터넷 번역기를 통해 영문으로 옮긴 뒤 알고 지내던 미국인 영문학자에게 이메일로 수정을 부탁했다. 놀랍게도 돌아온 영문에는 수정한 부분이 거의 없었다. 구글 번역기의 조악한 수준에 기계 번역의 수준을 폄하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세상이 변했고 그 변화를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인공지능 시대에 사라질 직업군에 통역가, 번역가도 들어가 있고 네이버 번역기 ‘파파고’의 활약상을 듣고 있던 터였지만 20년 번역가로서 번역만큼은 인간지성의 결과물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를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원고지 5천 쪽에 달하는 루소의 『고백』을 2년간 꼬박 번역하고 나의 최대 학문적 업적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터에 ‘파파고’가 불과 한 시간도 안 돼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면 번역가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도 알파고를 비웃다가 눈물을 삼킨 커제 9단의 처지에 놓일지도 몰랐다.

번역 분야에서 인공지능의 발전을 알려주는 소문들은 번역가로서는 놀랍기보다는 흉흉하기만 하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무라카미 하루키 번역본과 구글 번역이 큰 차이가 없다거나 국보 303호 「승정원 일기」 번역에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전시 암호해독으로 시작한 1세대 기계번역이 통계 기반의 2세대를 거쳐 이제는 ‘인공신경망 기반 번역’이라는 3세대로 접어들어 마침내 언어통일 시대로 가고 있다는 기사가 눈에 띤다. 특히 인공신경망 방식은 데이터를 이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알파고와 마찬가지로 번역 데이터를 학습해 가장 자연스러운 문장을 스스로 찾아낸다고 하니 번역가가 언어적 문화적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번역 일을 사라지게 만들지도 모르는 현실에 마냥 두려워하지 않고 번역가로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문해보게 된다. 질문을 바꿔 번역가는 파파고보다 혹은 구글 번역기보다 무엇을 더 잘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단어와 문장에 대한 정확한 이해, 문맥의 파악, 사회적, 문화적 언어에 대한 이해, 역주의 정확성 등이 번역에 있어서 인공지능 번역기와의 경쟁 영역이 될 것이다. 물론 번역가의 능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단어와 문장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번역의 속도에 있어서는 번역기가 오역의 가능성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인공지능의 경우 지속적인 자가학습이, 번역가의 경우 경험이 축적돼야 할 것을 전제로 한다면 말이다. 저자, 등장인물의 말에 대한 이해, 문맥에 대한 이해만큼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믿고 싶다. 예를 들어 ‘용기를 내(courage)!’라는 불어 단어를 등장인물이 ‘잘 해보시지!’라는 빈정거리는 투로 사용했다면 인공지능이 정확하게 번역해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신조어, 사회적 문화적 문맥이 담긴 단어의 이해에 있어서는 인공지능의 학습능력에 따라 번역가와의 차이가 거의 없어질 것이다. 고전이나 전문분야 책에서 필요한 역주의 경우 인공지능은 필요한 정보를 그때그때 찾아가는 하이퍼텍스트를 활용할 것으로 예측된다. 인물 정보와 같은 단순한 역주의 경우 인공지능의 능력이 더 나을 수 있겠지만 이야기의 상황에 대한 이해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린 장 자크 루소가 후식을 먹지 않고 식사 자리를 뜬 이유가 당시 徒弟는 후식을 먹을 권리가 없어서였다는 것을 인공지능이 알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에게 번역가의 자리를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는 글로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번역을 하면서 인터넷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종이 사전을 뒤적이는 대신 프랑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서 문맥에 따른 단어의 의미를 해석하고, 위키피디아에서 정보를 얻는 것으로 문장의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파악하고 있다. 지금 같아서는 인공지능이 번역한 ‘초고’를 다듬는 것이 미래 번역가의 일이라고 믿고 싶지 않지만 그런 시대에 대비할 필요성도 느껴진다. 다만 내가 한 번역이 인공지능의 그것과 차이가 없다는 말을 독자들에게 듣게 된다면 그 때는 번역 일을 깨끗이 그만둘 것이다.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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