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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안료로 곱게 단장한 하얀 얼굴…풍류를 실감케 한 작품
코발트안료로 곱게 단장한 하얀 얼굴…풍류를 실감케 한 작품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
  • 승인 2018.03.12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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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70. 백자청화매화문항아리(白磁靑畵梅花文壺)
사진1 백자청화매화문항아리
사진1 백자청화매화문항아리

오랜 기간 문화재를 연구하는 과정에 놓이게 되면 일종의 작은 고정관념이나 公式이 스스로 자리 잡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朝鮮初期에 제작된 청화백자는 상당히 비싸고 귀한 재료인 코발트안료(靑畵顔料) 때문에 왕실관요에서 제작되고 청화안료의 그림은 반드시 왕실화원화가의 뛰어난 그림이 그려져 있어야한다는 고정관념이다(실제로 국내외에 現存하는 조선 초기 청화백자의 文樣은 수준 높은 裝飾文樣이나 四君子, 山水人物, 動物文樣이 주류를 이룬다, 사진1, 사진2,사진3)

사진2 백자청화매화문항아리(삼성미술관 리움)<br>
사진2 백자청화매화문항아리(삼성미술관 리움)

 

이런 고정관념이 약 30년간 필자의 마음속은 물론이고 韓國陶磁史를 전공하는 연구자들의 뇌리에도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에 實見한 유물 한 점이 30여 년간 자리 잡았던 필자의 고정관념을 순간에 바뀌게 했으니 그 유물에 내재된 학술적 의미는 실로 대단했고 작은 유물 한 점의 소중함이 새삼 중요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조선초기청화백자(15세기~16세기)는 제작당시에도 진귀하고 값비싼 재료인 청화안료의 영향으로 극소량만 주문제작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현재까지 傳來되는 유물의 량은 더욱 더 희소하다(國內外 모두 합하여 50여점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미 알려진 유물이외에 개인이 소장하고 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조선 초기 청화백자를 實見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얼마 전 知人으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고 학교 연구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상황이 떠오른다. 遺物의 사진을 미리 받아보아 유물의 眞假判斷은 어느 정도 서 있던 터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마침내 보자기에 싸인 유물이 도착했고 풀어지는 틈새로 보이는 遺物의 오동나무상자에는 “李朝初期梁付 蕨枝文壺” 라고 墨書돼 있었다. 前所藏者였던 日本人은 도자기의 문양을 “蕨枝”로 보아서 ‘고사리 잎 문양’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遺物이 코발트안료로 곱게 단장한 하얀 얼굴을 오동상자 밖으로 내미는 순간에 조선 초기백자의 발색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항아리의 형태는 조선 초기에 유행하던 전형적인 모습으로 15세기말에서 16세기 초에 제작된 立壺였다(조선 초기에 제작된 항아리는 몸통이 길쭉한 立壺와 몸통이 둥그런 圓弧가 제작됐다). 雪白色의 하얀 몸통에 그려진 문양을 살펴보니 ‘백자청화매화문항아리(白磁靑畵梅花文壺)’가 적절한 명칭이라 할 수 있었다(사진4).

사진2 백자청화 기사윤구월 명산수인물문유개호(1509년제작)
사진3 백자청화 기사윤구월 명산수인물문유개호(1509년제작)

이 청화백자의 主文樣은 두 그루의 매화나무가 대칭이 되어 그려져 있고(사진5),(사진6) 그 사이로 작은 나뭇가지(사진7)와 고사리처럼 생긴 나뭇가지 무늬(사진8)가 있다. 前所藏者는 이 나뭇가지 무늬를 보고 ‘蕨枝文壺(고사리 잎 문양의 항아리)’로 명칭을 붙여 놓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도자기에 그려진 문양을 보면 매화꽃이 핀 계절로 매화나무의 이파리는 아직 새싹이 움트지 않은 초봄이다. (사진7)의 작은 나뭇가지에도 이파리는 붙어있지 않고 잎의 순도 안 보인다. 따라서 아직 고사리가 나올 시기는 아니며 (사진8)의 고사리처럼 말린 것은 나뭇가지를 묘사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몸통의 중심부에 대칭이 되게 그려진 두 그루의 매화나무에는 매화꽃 세 송이가 큼직하게 피어있고 곧게 선 나무를 중심으로 양 쪽 가지를 이어 붙였다(사진5).

맞은 편 매화나무는 마치 풀꽃처럼 꽃이 피어있으며(사진6) 나무의 몸통이나 가지의 굵기도 비슷하고 꽃의 크기나 형태도 제각각이다. 靑畵의 發色도 일정하지 않아서 코발트안료가 두껍게 칠해진 짙은 코발트색과 엷게 칠해진 푸른 청색이 동시에 나타나기도 하며 안료가 번진부분도 있다(사진9).

 

사진4 백자청화송조문호(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사진4 백자청화송조문호(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몸통의 높이가 16.2cm이고 굽 지름은 12cm, 입 지름은 9.5cm로 비교적 작은 기형에 속하며 胎土는 정선되고 유약 또한 맑고 투명하여 王室官窯에서 번조된 上品의 조선 초기백자로 단정 지을 수 있다. 바닥의 굽(사진10)에는 가는 모래받침 흔적이 남아있으며 유약이 두꺼운 부분은 약간의 산화흔적이 있고 입구의 일부분과 몸통이 燔造할 때 고열을 받아서 조금 내려앉았다(사진8).

전체적인 그림의 構圖는 조선 초기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몸통에 그려진 문양은 마치 17세기에 지방 民窯에서 유행하던 추상적인 철화백자의 모습이다. (사진11)의 백자처럼 저렴한 鐵畵顔料로 지방 民窯의 陶工들이 자유분방하게 도자기에 그려 넣은 추상적인 그림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16세기에 왕실관요에서 귀한 청화안료로 제작된 청화백자에 17세기의 값싼 재료(철화안료)로 제작된 추상적인 문양이 나타난 사례는 없었다. 

이 청화백자(사진4)에 대한 역사적 의문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 陶工 마음대로 제작할 수 없었던 값비싼 청화백자를 추상적인 문양으로 그려 제작하게 지시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 王室의 어린아이가 그린 작품을 기념으로 남긴 것일까? 
◎ 寫實畵의 경지를 넘어 선 왕족이나 上流層 文人의 멋진 작품일까? 
◎ 이 도자기를 왜 副葬品(도자기의 굽바닥에는 매장되었던 흔적이 있음)으로 사용했을까?
◎ 도자기의 제작자와 彼葬者는 어떤 관계였을까? 

文獻에선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 사실과 예술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遺物의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멋지고 흥미로운 靑畵白磁이다. 아울러 수 십년간의 고정관념을 타파해 주고 先祖들의 멋들어진 풍류를 실감하게 해 준 名作이다. 

문화재를 연구하면서 조금씩 알아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에 다시한번 나 스스로를 반성 해 본다. 

사진5 매화무늬
사진5 붉매화무늬
사진6 매화무늬
사진6 매화무늬
사진7 아래부분의 작은 나뭇가지무늬
사진7 아래부분의 작은 나뭇가지무늬

 

사진8 아래부분의 고사모양 가지무늬
사진8 아래부분의 고사모양 가지무늬

 

 

 

 

 

 

 

 

 

사진9 코발트안료의 발색(확대사진)
사진9 코발트안료의 발색(확대사진)
사진10 바닥 굽의 확대(부분)
사진10 바닥 굽의 확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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