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9:35 (금)
인공지능 시대에 노자는 왜?
인공지능 시대에 노자는 왜?
  • 홍승표 계명대·사회학과
  • 승인 2018.02.26 11: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을 말하다_ 『노자와 탈현대문명』 홍승표 지음 | 살림터 | 264쪽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문명의 종말과 비약이라는 갈림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현 상황은 위태로워 보인다. 제4차 산업혁명이란 새로운 하드웨어를 현대 세계관이란 낡은 소프트웨어의 그릇에 담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낡은 세계관과 새로운 기술 간에 거대한 문명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시급한 과제는 ‘현대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여기에 ‘인공지능 시대에 케케묵은 노자는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있다. 26년 전, 필자에겐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노자는 필자를 ‘현대의 꿈’에서 깨어나게 했다. 사회학자인 필자는 노자가 깊은 수렁과도 같은 ‘현대의 꿈’에서 인류를 깨어나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노자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책 ??노자와 탈현대문명??을 출판하게 됐다.

『노자』 속에는 미래를 위한 예지가 풍부하게 내장돼 있다. 이 책을 통해 필자는 새 시대를 위한 황금광산인 노자를 채굴하고 제련해서, 인류가 낡은 생각과 삶을 벗어나 놀라운 문명의 점프를 이루는데 기여하고자 했다. 이 책의 내용은, 노자의 관점에서 1) 현대문명 비판, 2) 탈현대문명으로 나아가는 방법, 3) 탈현대문명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인류가 빠져있는 깊은 어리석음

‘현대’는 거대한 망상이 돼버렸다. 우리는 바쁜 걸음걸이로 높은 곳에 도달해서 행복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행복을 위해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 불행에 빠져드는, 현대는 늪이 되어버렸다. 노자는 ‘현대의 꿈’에서 깨어나라고 말한다.

현대인은 강함을 추구하면서 도와 어긋난 삶을 살아간다. 그 결과, 현대사회에는 약육강식이 팽배해 있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부자는 빈자를 능멸한다. 도와 합치하는 것은 겸손한 것인데, 현대인이 할 수 없는 것이 겸손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나 상대편을 무례하게 대하고, 세상은 더욱 고통스런 곳으로 변해간다.

노자는 말한다. “까치발로는 오래 서지 못한다.” 현대인은 까치발로 서려한다. 왜일까? 남들보다 높아지고 싶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자신을 높이고, 빨리 가고자 하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하며, 스스로를 옳게 여기고, 뽐내려고 한다. 현대인은 이렇게 소중한 삶을 낭비한다.
 

에고로부터의 탈출

현대문명은 외부세계의 개조를 통해 건설됐다. 하지만, 탈현대문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내면세계의 변화이다. 수행을 통해, ‘에고의 허물을 벗고 ‘참나’에 이르는 것’, 이것이 바로 탈현대문명 건설 방안이다. 탈현대문명 건설을 위한 노자의 방안은 무엇일까?

수행은 현대의 망상에서 깨어나 탈현대로 나아가는 좁은 문이다. 수행에 힘을 기울일 때, 개인적으로는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고, 그의 평화와 행복이 이웃에 좋은 영향을 미쳐, 나와 나의 이웃의 창조적인 변화를 통해 세계는 변하게 된다. 그래서 노자는 말한다. “도를 닦아 몸에 베풀면 그 덕은 곧 참되고, 도를 닦아 집안에 베풀면 그 덕은 곧 넉넉하며, 도를 닦아 천하에 베풀면 그 덕은 곧 널리 퍼진다.”

환란은 귀한 손님이다. 모욕이나 미움을 받음, 시험이나 승진 실패, 사업부도, 외모 훼손, 건강 악화 등 현대인이 겪는 환란은 끝이 없다. 현대인은 필사적으로 환란을 벗어나려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큰 환란을 제 몸처럼 귀하게 여겨라.” 노자는 왜 이런 이상한 주장을 한 것일까? 수행의 목표는 에고를 깨뜨리는 것이다. 칭찬, 인기, 성공, 이런 것들이 에고의 보호막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임에 반해, 환란은 에고를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에고의 차원에서 보면, 환란은 재앙일 따름이지만, 수행의 차원에서 보면, 환란은 ‘참나’에 이르는 좁은 문이 된다.
 

탈현대문명의 비전: ‘참나’가 꽃핀 사회

현대문명이 에고에 기초하고 있다면, 탈현대문명은 ‘참나’에 바탕하고 있다. 탈현대문명은 어떤 것일까? 『노자』  속에 담겨 있는 탈현대문명에 대한 비전을 찾아본다.

탈현대는 목적지에 이미 도착한 사회이다. 노자는 말한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현대인이 할 수 없는 것이 만족하고 그치는 것이다. 탈현대인은 어떻게 만족하고 그칠 수 있을까? 탈현대인은 성공이나 인기 같은 하찮은 것을 덧붙여야만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가 될 만큼 자신이 하찮은 존재가 아님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지고는 못사는’ 사회이다. 그러나 노자는 말한다. “이기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지 않는다.” 승리의 쾌감은 경쟁심의 크기에 비례한다. 승부가 의미를 갖는 것은 오직 에고의 세계에서뿐이다. ‘참나’의 세계를 살아가는 탈현대인에게는 경쟁심이 없고, 탈현대인은 이기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지 않는다.

탈현대는 편안하고, 평온하며, 태평한 사회[安平太]이다. 가난한 사람이 업신여김 받지 않는 사회, 장애인이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노인이나 병약자를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하지 않는 사회,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면서,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탈현대사회이다.

노자는 말한다. “착하지 않은 사람을 나는 또한 착하게 대한다.” 이 말에 현대인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내가 왜 못된 사람을 착하게 대해줘야 하는 거죠?’ 못된 사람을 착하게 대하는 것은 성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탈현대사회는 성인의 사회이며, 그래서 착하지 않은 사람도 착하게 대하는 사회이다.

노자는 말한다. “나는 감히 나서서 주인이 되지 않고 나그네가 된다.” 현대사회는 모든 영역이 중심과 주변으로 이분화 돼 있다. 반면에 탈현대사회는 어느 것도 중심이 아니면서 모두가 중심이 되는 탈중심적인 사회이다.

노자는 말한다. “큰 나라는 작은 나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크고 강한 것이 작고 약한 것의 아래에 위치하는 사회, 이것이 바로 탈현대사회의 모습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탈현대인은 아무리 큰 것도 영원과 무한에 빗대어 보면 지극히 작은 것임을 알 수 있고, 아무리 작은 것도 그 안에 영원과 무한을 품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홍승표 계명대·사회학과
아이오아주립대에서 동양사상과 탈현대 사회이론으로 박사를 했다. 『깨달음의 사회학』, 『동양사상과 탈현대적 삶』 등의 저서가 있으며 동양사회사상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