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07:45 (금)
포스트모더니즘과 철학의 소임
포스트모더니즘과 철학의 소임
  • 김광수 전 한신대 교수·분석철학
  • 승인 2018.02.26 1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이한구 교수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을 분석한다」를 읽고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는 <교수신문> 905호에 「인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제목으로 한 원로칼럼을 기재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했습니다. 이 칼럼을 읽은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좀 더 심도 깊은 토론을 제안한다며 「이한구 교수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을 분석한다」는 기고문을 보냈습니다. 편집국은 50매에 달하는 원고 전문을 <교수신문> 907호 1, 8면에 나뉘어 실었습니다. 학계 원로들의 성숙한 토론을 통해 교수사회에 건전한 토론문화가 꽃피우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이번호(910호)에서는 이 교수의 입론, 정 교수의 반론을 메타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김광수 전 한신대 교수(분석철학)의 글 「포스트모더니즘과 철학의 소임」 전문을 싣습니다. <교수신문> 편집국은 다양한 분야의 선생님들께서 학술토론에 참여하시기를 기대합니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1. 쟁점

이한구 교수는 「인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교수신문> 905호, 2018년 1월 1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는 인문학이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개탄한다. 인류는 지금 환경과 기후문제,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 자민족 중심주의 역사관, 국경과 이주의 제한, 핵전쟁의 위험, 양극화의 심화, 성차별, 패권주의 정치 등의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고, 세계화와 4차 사업시대에도 대처해야 하는 엄중한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당면한 삶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 인문학이, 작금의 뜨거운 인문학 열풍에도 불구하고,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를 부추기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경도되어 있어서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 교수의 입론에 대하여 정대현 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일상언어」(<교수신문> 906호, 2018년 1월 22일)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옹호에 초점을 맞추어 이 교수의 견해를 비판한다. 정 교수는 푸코, 료타르, 들뢰즈, 바디우, 바티모, 보들리야르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들이 피력한 견해들을 압축적으로 소개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이 교수의 인문학 실재론를 무력화시킨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삶의 실재에 닻을 내리지 못한다고 이 교수가 오해한 것으로 보면서, 정 교수는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상언어의 다원적, 개방적, 과정적 운동을 통해 일상언어의 실재론으로 정착해 있다고 논변한다.

필자는 두 원로 철학자가 <교수신문>의 독자들 앞에서 벌인 샅바 싸움이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난해한 철학 사상을 좁은 지면에서 논하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독자들은 특히 정대현 교수의 고난도 ‘강의’를 따라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필자는 인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놓고 벌이는 입론과 반론을 음미ㆍ평가하고, 삶의 현장에서 인문학, 특히 철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 지에 대한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2. 인문학 열풍

월남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말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서점가에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한동안 도시 전체를 통틀어 헤르만 헤세의 책을 구할 수 있는 서점이 없었다. 책이 서가에 꽂히기가 무섭게 팔려버린 것이다. 질풍같이 번져간 헤세 붐을 선도한 작품은 소설 『황야의 이리』였다. 반전사상, 속물들에 대한 비판, 기만적인 전쟁과 쇠잔해진 문명과 권위주의적인 기성 질서에 반기를 든 젊은이들의 의식과 호응하는 현상이었다.(김누리)

이와 유사한 현상이 작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최영미 시인의 첫 시집 『서른, 찬치는 끝났다』가 50만 부가 팔렸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이즈베리)는 철학서인데도 밀리언셀러이다. 상당수의 다른 인문학 서적들도 스테디셀러다. 대형 서점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별도의 코너를 마련할 정도이다.

전국 지방자치단체, 복지회관, 평생교육원, 문화센터, TV를 비롯한 각종 언론 매체, 도서관…심지어 교회와 사찰에서까지 인문학 강좌를 다투어 열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뽑겠다’는 인사방침을 내놓는다. 법조계에서도 ‘사건을 다룰 때 인문학적 상상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새삼 인문학 공부를 독려한다. 인문학 열풍, 아니 강풍이 한반도를 강타하고 있다.

왜 그럴까? 애플 CEO 스티브 잡스가 2011년 3월 제품 설명회에서 “애플의 DNA는 기술력만으로 충분치 않다. 교양과 인문학이 결합한 기술이야말로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결과를 만든다”고 한 말에 자극 받았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인문학과 결합한 기술이 가슴을 뛰게 한다는 말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사회의 인문학 열풍은 우리 사회가 병들었다는 것을 증언한다. 병이 들었으니 열이 나는 것이다. 반세기 만에 경제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다고 환호하는데, 소수의 금수저를 보고 다수의 흙수저는 어깨가 처진다. 사회 구석구석이 속속들이 썩어 그 악취에 숨쉬기조차 힘들다. 대통령이 탄핵을 받을 정도이니 더 말할 것 없다.

이처럼 나라가 중병이 들었는데, 인문학적 갈증에 목말라 하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의 대오에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는데, 이게 다란 말인가? 도대체 산다는 것이 무엇이고 또 그 의미는 무엇인가? 왜 “인간은 지구의 질병”(니체)인가? 취업에 도움이 안 된다고 인문학의 보루이어야 할 대학마저 인문학을 퇴출시키는 자가당착적 상황에, 조금이라도 생각 있는 사람들은 인문학적 물음을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문학 열풍은 우리 사회가 병들었다는 것, 사람들이 그 병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 병이 치유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말해주는 역설적 현상이다. 보통 사람들도 하이데거가 말한 ‘앎에의 열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것일까? 차제에 인문학의 주체들이 시장에서 홀대 밭는다고 투덜거리는 대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인문학이 어찌 됐든 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이한구 교수의 호소는 지당하다.

사실 문학, 역사, 철학, 예술 등의 인문학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고, 풍자하고, 상상하고, 꿈을 말하고, 대안을 제시해 왔다.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소크라테스는 시인을 추방한다. 그것은 시인들이 온갖 신들의 잡스러운 이야기로 사람들을 미혹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소크라테스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臆見(doxa)에서 진리의 빛 속으로 인도하고자 한 것이다. 

인류 역사는 미개에서 문명으로, 밀림에서 도시로, 노예로부터 주인으로,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나아가기 위한 문제 제기와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인문학의 역할은 컸다. 인문학은 비판적 사유를 통해 삶에 대한 다면적이고 심층적인 이해를 제공하며, 인류가 공생공영 하는 길을 안내한다. 과학 기술과 더불어 인문학은 세상이 점점 더 살고 싶은 곳으로 변화도록 하는 데 기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3. 모더니즘

서양의 15-18세기 근대는 문화적 격변기였다. 활자의 발명, 문예부흥, 종교개혁, 프랑스 혁명, 산업혁명, 과학의 진보와 같은 역사적 사건들이 봇물처럼 터진 것이다. 이 모든 사건들을 가로지르는 정신은 계몽주의로서, 우리가 ‘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시대정신의 모태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극복하고자 하는 모더니즘의 특징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첫째, 모더니즘은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를 통하여 자아의 존재가 지적 탐구의 아르키메데스 포인트임을 도출해 낸다. 아무리 의심할지라도 의심하는 자아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기반으로 데카르트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명석ㆍ판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진리이고, 이러한 이성적 탐구를 통하여 인간은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둘째, 모더니즘은 본질주의를 전제하고 있다. 세계는 잡다하고 무질서하고 파편적인 개별자들의 하치장이 아니다. 개별자들은 보편의 예화이다. 불변의 진리, 정의, 선, 미, 의미, 보편성, 객관성이 있고, 인간의 삶을 그 반석 위에서 전개시켜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셋째, 모더니즘은 과학주의를 예고하고 있다. 과학은 계측, 수치화, 실험 등의 ‘과학적 방법’으로 중세와 고대의 생각들을 퇴출시키기 시작하였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생명체의 자연발생론은 거짓이며, 병의 원인은 귀신이 아니라 병균이이라는 것이 드러났으며, 진화론이 창조론에 뼈아픈 상처를 입혔다. 과학적 탐구는 이성적 탐구의 전형인 바, 인간은 과학을 통해서 눈이 밝아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과학은 국력이고, 국방이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서 현대인의 우상이다. 이러한 과학주의가 근세에 태동한 것이다.

넷째, 모더니즘은 인간 문화의 진보를 낙관하고 있다. 과학적 탐구를 통해서 인간은 자연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인간을 병마와 고된 노동과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역사는 합리성이 지배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고, 삶의 조건들이 향상되어 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며, 도덕적으로도 성숙해질 것이라는 희망에 차 있었다.

이러한 모더니즘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세계의 주인으로 우뚝 설 수 있게 한다. 베버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성적 인간은 합리적 사고를 통해서 ‘세계의 탈미신화’를 이루고, 정치, 경제, 과학, 산업, 문화 등 삶의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을 가져올 것으로 생각했다.
  
4.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문학, 회화, 음악, 무용, 건축, 정치,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모더니즘의 본질주의적, 낙관적 시대정신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다. 세계는 점점 살기 좋아지는 듯했다. 과학ㆍ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산업화로 경제적 여건이 개선돼갔다. 노예가 해방되고, 노동조합이 탄생하고,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모더니즘의 핵인 이성이 위기를 맞는다. 산업화, 도시화, 자본주의, 관료제도 등이 이성을 도구로 전락시킨 것이다. 이성은 당면한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을 모색하고, 저울질하고, 계산하는 도구가 되었다. 궁극적 목적을 추구하는 본질적 이성의 역할은 돌볼 겨를이 없는 ‘비현실적’ 이상이 됐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눈부셨다. 그러나 자연 파괴, 환경오염, 핵전쟁 위험 등 지구적 차원의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다. 자연을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마저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는 데 이르렀다. 인간은 과학ㆍ기술의 서슬에 거대한 공장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자신의 삶에서마저 소외됐다.

인간 문화의 진보에 대한 낙관론도 찬물을 맞았다. 안전하고, 도덕적으로 성숙하고,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특히 600만 명을 학살한 히틀러의 광기에 인류는 치를 떨면서 모더니즘의 이상에 대하여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마르셀 뒤샹은 1917년 변기를 뒤집어 놓고 「샘」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에 출품함으로써 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묻는다. 존 케이지는 1952년 「4분 33초」라는 피아노 독주곡을 발표하는데, 연주자는 4분 33초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고 있다가 연주를 마친다. 이 기괴한 연주에 대하여 케이지가 한 말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음악이다”였다. 피터 한드케의 연극 「관객모독」(1966)에서 배우들은 관객을 향해 온갖 욕설을 해댄다. 피카소가 추상화한 인간의 모습은 일그러지고 뒤틀렸다. 카프카는 『심판』(1927)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체포돼 죽음을 당하는 K의 이야기로 속절없는 인간의 운명, 또는 관료주의의 폭력을 고발한다. 까뮈는 『이방인』에서 존재의 부조리성을 고발하고, 싸르트르는 『구토』에서 바닷가의 조약돌을 보고 구토를 할 정도로 존재의 이유 없음에 진저리를 치고 있다.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철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고 현란하다. 여기서 정 교수가 거론하는 푸코, 들뢰즈, 료타르, 데리다, 보드리야르 등의 견해를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사상의 진수를 논하기에는 지면이 좁고, 단 몇 줄로 소개하기에는 이해보다는 오해를 낳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교수의 논의를 이해하는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기대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게임이론을 간단히 음미해 보자.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전기 사상을 담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가 세계와의 논리적 구조를 공유함으로써 세계에 관한 ‘진리’를 그려내는 특권적 역할을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리고 언어로 그려지지 않는 것, 즉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의 후기 철학서인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는 ‘자연의 거울’(로티)이 아니라 ‘언어 게임(놀이)’에서 사용되는 도구이다. 예컨대 장기 게임에서 말들은 서로 잡아먹기도 하고 잡아먹히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게임의 상황에서 궁은 흉기로 사용될 수도 있고, 졸은 공기돌이 될 수 있다. 궁이 궁 노릇을 하는 것은 그 나무 조각이 가진 어떤 본질적 속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장기 놀이의 맥락 안에서 부여받은 역할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언어의 의미는 세계에 있지 않고 사용에 있다. 그는 철학자들이 ‘일반화의 열망’으로 드러나 있는 것들의 배후에 있다고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본질을 그려낼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질타한다. 그래서 철학은 설명을 그치고 기술만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러한 언어관을 받아들이면 세계의 본질에 대한 논의나 세계의 법칙적 구조에 대한 탐구 같은 것은 원칙적으로 무의미하게 된다. 콰인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소위 ‘지식’의 총체는 ‘인간이 만든 직조물’에 불과하게 된다.

이와 같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는 현대 철학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다. 콰인의 존재론적 상대주의, 파이어아벤트의 지적무정부주의, 데리다의 해체주의, 알튀세의 구조주의, 로티의 신실용주의 등의 현대 철학 사상들은 이와 같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와 어떤 형식으로든 근친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대체로 진리 탐구로서의 철학이 파산했음을 선고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사도를 자처하는 로티의 견해를 조금만 살펴보자. 로티에 의하면 진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진리는 세계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고안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준-신적이라고 여기지 않아도 되고 어떤 것도 숭배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언어, 우리의 양심, 우리의 공동체 등 모든 것은 시간과 기회의 산물일 뿐이다. 과학도 예외가 아니다. 과학자들이 도입하는 새로운 개념들과 용어들은 메타포일 뿐이다. “과학적 혁명들이란 자연의 내재적 성질에 대한 통찰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메타포적 재서술들’”이다. 새로운 이론을 제창하는 과학자, 정치 사회적 지도자,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대담하게 새로운 메타포를 창안하는 시인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이 교수가 인정하는 것처럼, 무엇보다도 해방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독단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하고, 특정한 사상이나 이념의 포로가 되는 것이 어리석다는 깨달음을 준다. 또한 상대주의를 함의하기 때문에, 이질적인 삶의 양식에 대해 관용할 수 있게 한다.

5. 평가

이한구 교수는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반면, 정대현 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다원주의, 개방성, 경직된 모던적 사고의 담론화 등을 통해서 당면한 문제들에 대하여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이들 입론과 반론을 평가해 보자.

포스트모더니즘은 데카르트에서 발원한 인식론의 후예이다. 진리 탐구가 목표인 철학은 당연히 탐구 행위 자체가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당연히 물어야 한다. 세계는 우리가 보는 그대로인가? 데카르트는 명석ㆍ판명한 인식일 경우 그렇다고 답한다. 신은 거짓말쟁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클리는 반발한다. 그는 마음 밖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마음속의 관념뿐이라는 과격한 유아론적 관념론을 내놓는다. 현대에 와서 분석철학자들은 관념보다 언어에 주목한다. 언어는 세계의 그림인가? 그렇다는 것이 모더니즘적 사고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이다. 인식론과 언어철학은 사촌지간으로서 모두 삶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를 다루는 메타철학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인문학의 관심 대상인 인간과 생활세계를 들여다보자. 조금 느슨하게 말하자면, 대다수의 생활인들은 이성, 진리, 정의, 선, 미, 보편성, 일반성, 실재론, 객관성, 의미론 등에 대한 모더니즘적 신념을 가지고 산다. 예컨대 실재론을 전제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도 없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빤하다. 생활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법과 제도는 모더니즘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이상이 갈 길은 멀다. 실용주의, 기능주의, 도구적 합리성, 마키아벨리즘, 배금사상, 무한경쟁, 적자생존, 이기주의, 당파주의, 힘의 논리, 몽매주의, 광기 등이 간단없이 세상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인문학 열풍이 불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양산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할 말이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일언이폐지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극복하고자 하는 메타철학이기 때문이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은 결과적으로 생활인들의 모더니즘적 사고도 비판한다. 그러나 생활인들에게 이 비판은 생뚱맞다. 예컨대 천부인권 같은 것은 없고, 이 말이 사용되는 언어게임이 있을 뿐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모더니즘적 생활인은 당황해 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철학이 밥을 먹여주지 않는 이유를 알 만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모더니즘적 이상의 훼방꾼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자기들의 삶의 방식과 어울린다고 아전인수 격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아무려나 상관없다”는 반응을 할 가능성이 더 크다.

이 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정치적 포퓰리즘과 결탁하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럴까? 정치가들이 포스트모더니즘과 결탁하여 ‘정치적’일까? 대다수의 정치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과 관계없이 ‘정치적’이다. 마찬가지로 정대현 교수의 포스트모더니즘 옹호도 과녁을 빗나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분야에서 지칭적 언어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여 그 분야들을 담론화하고 있”다는 정 교수의 말은 믿기 어렵다. 모더니즘적 생활인과 ‘반모더니즘적’ 생활인의 각축장인 삶의 현장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는 별도의 장이 필요할 것이다).

이 교수와 정 교수는 모두, 유감스럽게도, 철학과 메타철학을 구분하지 않고 인문학적 문제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역할을 논하고 있어서, 진지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의 역할에 대한 이렇다 할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6. 철학의 소임

철학은 메타철학에만 매달려 있는 한 철학 본연의 소임을 다할 수 없다. 철학은 삶의 현장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회의주의의 대부 격인 흄도 자신이 이중생활을 한다고 고백하였다. 철학자로서는 회의주의자이지만, 생활인으로서는 실재론자라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철학자들은 메타철학을 하면서도 삶의 현장에서는 그냥 철학을 해야 하는 이중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코앞에 닥쳐온 4차 산업시대의 인조인간 ‘아트’(데이빗슨)를 생각해 보자. 아트는 어떤 면에서도 인간과 구분이 안 된다. 겉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인식하고, 판단하고, 대화하고, 시도 쓰고, 사람과 연애도 한다. 여러 가지 추리를 할 줄 알고, 계산은 순식간에 한다. 자, 아트는 마음이 있을까? 자유의지가 있을까? 윤리적,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아트에게 ‘인권’을 부여해야할까? 인조인간은 언젠가 인류에게 재앙이 되지 않을까? 이 재앙을 막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모든 인문학적 물음들에 대하여 인문학은, 특히 철학은, 어떻든 답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조인간 스스로 답을 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 때 가서도 철학은 메타철학에 매달려 있을까?)

‘자기들만의 리그’를 벌이는 철학자들도 많지만, 세상을 향해 인문학의 소임을 다하는 철학자들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 국민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99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집필과 강연을 통하여 후회 없는 삶의 지혜를 역설한다. 언어학자이며 철학자인 촘스키 역시 90세의 고령인데도 격동하는 세계를 향하여 웅변하고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월터스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미래의 지도자적 민주 시민들에게 비판적 사고와 창의적 사고를 심어주는 데 전념하고 있다. “보다 충실한 삶”의 원형을 찾고자 2013년 호주에서 처음 창간된 계간지 《뉴필로소퍼》(번역본이 나와 있다.)는 노엄 촘스키, 토마 피케티, 제인 구달, 피터 싱어 등 세계적 지성들을 동원하여 매호 하나의 주제를 논하는 단행본 같은 잡지를 출판하고 있다. 그간 ‘타인의 고통,’ ‘인간은 왜 웃는 걸까,’ ‘페이크 뉴스,’ ‘가상 인물과의 사랑’ 등 18권이 나와 세상을 위한 철학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프린스턴대 철학과의 프랭크퍼트(Harry Frankfurt) 교수의 『On Bullshit』(『개소리에 관하여』로 번역됐다)는 메타철학자(분석철학자)도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래는 한 편의 논문이었는데, 최근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의 작은 책으로 출판되어 급기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독특한 철학서이다. 

‘Bullshit’를 ‘개소리’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어떻든 불쉿은 소똥이다. 소똥은, 모든 똥이 그렇겠지만, 그냥 싸는 것이다. 소는 그것이 굵거나 묽거나 상관하지 않는다. 그냥 나오는 대로 싼다. 프랭크퍼트는 ‘불쉿’을 참과 거짓에 관심 없이 그냥 나오는 말이나 행동을 나무라는 비속어라고 분석하고 있다. 오늘날 개소리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난무하지만,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개소리에 쉽게 현혹된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런던 타임스>가 환호한다. “한 마디만 하겠다. 읽어라. 멋지고, 명쾌하고, 반어적이며 심오하다. 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이다. 작지만 매우 도발적인 걸작이다. 이건 진짜 개소리가 아니다.”

인문학이, 철학이, 메타철학적 문제에만 기를 빼지 말고, 이처럼 박수를 받으며 세상 속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부끄러운 마음으로’ 기원해 본다.
 

 

김광수 전 한신대 교수·분석철학

캘리포니아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저서로는 『논리와 비판적 사고』, 『철학하는 인간』 등이 있으며 철학연구회장을 역임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