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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깊은 계곡에서 만나는 '순례자의 길'
설악산 깊은 계곡에서 만나는 '순례자의 길'
  •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DMZ연구팀
  • 승인 2018.02.19 12: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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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7.백담계곡-백담사-영시암-봉정암-석가사리탑-오세암

크고 깊은 설악의 풍경, 그 안에 숨겨진 계곡과 사람들의 이야기

6.25전쟁 이후 남북을 가르는 경계선은 1945년 분단 당시 38선과는 많이 달라졌다. 대체적으로 한반도의 서쪽지역은 이전의 38선보다 아래에 위치하게 됐으며, 동쪽지역은 이와 반대로 38선보다 위에 위치하게 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남쪽은 한반도 동쪽의 아름다운 설악을 얻는 대신, 서쪽의 해안과 맞닿아 있는 풍족한 평야지대를 잃었다고.’ 이렇듯 설악은 지금 풍족한 평야지대를 대신할 만큼 남쪽 국민들 대다수가 좋아하는 명승지가 됐다. 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설악산’은 무명의 산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雪’과 ’嶽’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그 당시 사람들이 접근하기에는 너무 춥고 깊을 뿐만 아니라 험준했을 테니까 말이다.

설악산은 지척에 있는 유려한 ‘금강산’에 비해 그 명성이 약했고, 6.25전쟁 당시에는 곳곳의 봉우리들이 대표적인 격전지가 됐다. 그 이후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설악산에는 ‘무장간첩이 출몰한다’는 이유로 종종 통행금지가 내려졌다. 그렇게 닫혀 있던 설악산이 사람들에게 점차 개방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이다. 현재 설악산관광지도를 살펴보면 설악은 ‘내설악’과 ‘외설악’, 그리고 ‘남설악’으로 구분된다. 안과 밖, 여기다가 남까지, 그렇게 설악산은 크고 깊다.

산이 크고 깊으면 그 곳을 가르는 계곡의 깊이도 깊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거기에 얽힌 이야기와 역사도 깊기 마련이다. 특히 내설악에 위치한 ‘백담계곡(백담골)’은 자장율사, 매월당 김시습, 삼연 김창흡, 만해 한용운에 이르는 역사 인물들의 이야기가 여전히 생생히 흐르고 있다. 백담계곡과 그 상류로 이어지는 수렴동 계곡을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절과 암자들에 담긴 그들의 생애, 그리고 그들에 얽힌 이야기들은 설악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萬海의 시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부터 용대리에 이르는 구간에 이름 붙여진 ‘백담계곡’에서 ‘百潭’은 ‘백 가지의 못’이라는 뜻으로, 애초 이 골짜기에 못들이 너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하기야 그 광경이 얼마나 신기하고 특색이 있어 보였으면 ‘백담’이라는 이름이 붙여 주었을까. 더구나 이 계곡은 물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숲을 끼고 있으면서도 모나지 않으며 부드러운 암반들과 아기자기한 조약돌이 어우러져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백담사로 넘어가는 공용버스의 통행을 제외하고는 일반차량의 운행이 제한돼 있어 그 풍광을 접하긴 힘들다. 그래서 백담계곡은 이 계곡의 상류에 위치해 있는 ‘수렴동계곡’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수렴동계곡이 내설악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대청봉을 오르는 등산로로서, 점차 명성을 얻었다면 백담계곡은 그 유명한 ‘백담사’에게 자신의 이름을 양보함으로써 그 아름다운 자태를 감추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백담계곡의 돌탑들’ (연구팀 촬영)

이 백담계곡을 따라 상류로 이동하면 백담계곡의 시작점을 만날 수 있다. 주위 폭이 넓고 잔잔하게 흐르는 계곡 사이로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의 자그마한 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조약돌과 자갈들이 사방으로 널려 있는 그곳에 계곡물이 줄어들면 사람들은 계곡에 흩뿌려진 돌을 소중히 모아 수천 개의 돌탑을 쌓는다. 이렇듯 백담계곡은 사람들의 소망을 담아 흐른다. 그런데 물과 나무, 돌과 사람들의 소망이 겹쳐 자연과 동화된 장엄한 풍경을 이루고 있는 수천 개의 돌탑을 좌우로 두고 계곡 사이에 놓인 야트막한 다리를 지나면 거대한 사찰이 눈에 보인다. 바로 ‘백담사’다. 

내설악의 가장 유명한 사찰인 백담사는 원래 647년에 자장율사(590-658)가 설악산 한계리 부근에서 창건한 ‘한계사’로부터 시작한다. 백담사라는 이름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기까지는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축사’(또는 ‘영취사’)등의 다양한 이름들을 거쳤다. 그런데 이 절에는 사찰 전체를 소실할 정도의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고 한다. 계속되는 화재는 스님들에게도 큰 걱정거리였다. 백담사라는 사찰명과 위치에 관한 전설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지금 백담사의 위치는 당시 주지스님의 現夢에 의해 지정됐다는 전설이 있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까지 담이 백 개가 되는 장소에 절을 지으면 재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백담계곡’의 그 ‘백담’이 다른 어떤 이름들보다 현재 사찰의 의미를 잘 드러내어 보여주었기에 ‘백담사’라는 이름이 최종적으로 확정됐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화마를 입지 않기를 바랐던 그 소망과 달리 1783년 ‘백담사’가 된 후에도 이 사찰은 몇 차례의 화재와 한국전쟁이 불러온 화마를 피할 수 없었으며 지금의 사찰은 1957년에 재건된 것이다.

 

‘백담사 입구’ (연구팀 촬영)

절 앞 ‘금강문’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 사찰 전체를 보면 갑작스럽게 터지는 시야에 놀랄 수밖에 없다. 차도 다니지 않는 험한 산자락에 자리한 절 치고는 경내가 널찍하게 가로로 퍼져 있으며 그 배치마저도 평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물과 건물 사이의 간격도 넓으며 깨끗하게 잘 정돈돼 있어서 마치 계획도시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광경들 속으로 조그마한 흉상이 눈에 들어온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시인 그리고 스님이었던 만해 한용운(1879-1944)의 흉상이다.
한용운은 백담사에서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 또한, 바로 여기서 그는 1926년 「님의 침묵」을 탈고했다. 「님의 침묵」에 실린 88편의 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구절,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라는 구절에서 ‘님’은 부처님과 같은 종교적 절대자, 사랑하는 연인, 조국 등과 같은 의미로 해석돼 왔다. 하지만 그것의 의미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 구절에 담긴 깊은 함축과 서정성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시가 그 당시 당면했던 조국의 현실과 민중의 삶을 고뇌하는 구도자로서의 만해선생의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만해 한용운의 흉상과 만해기념관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면서 또 다른 역사적 기억이 그와 너무나 대비적으로 중첩되면서 지나갔다. 그것은 1980년 광주학살과 12.12 쿠데타로 권좌에 올랐던 전두환 전직 대통령이 6.10민주항쟁 이후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광주학살에 대해서도, 쿠데타에 대해서도 결코 공개적으로 반성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곳 백담사에서 ‘日海’라는 호를 쓰면서 부처의 삶을 모방했다. 하지만 하나의 해이기를 표방했던 ‘日海’는 삼라만상 속에 존재하기를 원했던 ‘萬海’를 결코 이길 수 없다.

김창흡과 김시습의 흔적이 담겨 있는 영시암과 오세암

백담사를 나와 다시 다리를 건너가면 수렴동계곡을 옆에 끼고 있는 완만한 숲길이 보인다. 누구나 걷기 편안한 그 길로 접어들어 약 1시간 정도를 올라가다보면 소박한 산사의 풍경과 운치가 느낄 수 있는 ‘영시암’을 만날 수 있다. 원래 백담사로부터 시작해 오세암과 봉정암으로 가는 산행길은 많은 등산객들에게 알려진 유명한 등산코스이다. 그런데 이 곳 영시암은 오세암과 백담사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 산행길에서 반드시 만나게 되는 중간 쉼터 같은 곳이기도 하다.

‘백담’이 그러했지만 ‘永矢’라는 이름 또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永矢’는 ‘영원한(영원히 쏜) 화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결코 되돌아올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영시암이라는 이름 지은 이는 누구이며 그는 왜 이와 같은 이름을 지었던 것일까? 역사에 남은 기록들을 보면 영시암의 애초 모습은 삼연 김창흡(1653-1722)에서 시작된다.

숙종 15년인 1689년은 장희빈의 왕자 윤의 출생으로 시작돼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치 실세로 등장하게 된 ‘己巳換局’이 일어난 해이다. 서인의 거두였던 송시열이 제거되고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수항 역시 파직돼 철원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는데, 김수항은 김창흡의 아버지였다. 철원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죽고 큰 형 역시도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나자 김창흡은 속세와 인연을 끊고 명산 순례에 나섰고, 빼어난 산수절경이 펼쳐진 이곳 설악산 수렴동계곡에 자신의 터를 세웠다. 그리고 원래 삼연정자라 이름 붙여진 자신의 거처를 영시암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아버지와 형을 떠나보낸 그는 영원히 속세와 인연을 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아 이곳의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여기서 자신의 아픔을 달랠 수 있는 안식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이곳 영시암에서 그가 지은 이름을 제외하고 김창흡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그것은 원래의 영시암이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의 영시암은 1960년대 후반 당시 백담사의 주지였던 도윤스님에 의해 복원된 것으로, 그 규모는 범종루, 영시암, 법당, 삼신각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보통의 암자보다는 크다.

영시암을 벗어나 2.5km를 올라가면 현재 영시암과 함께 백담사의 부속 암자인 ‘오세암’이 나온다. 오세암으로 가는 길에서 잠시 멈춰 산등선 아래로 내려다보면 어디에나 기암괴석과 울창한 나무들이 보일 정도로 그 산수가 놀랍다. 특히 그런 산수에 둘러싸여 있는 오세암은 남다른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경내로 들어서자 여느 절에서 볼 수 있는 극락보전, 삼선각 등의 전각이 보이는데, 사실 오세암은 선덕여왕 때 세워진 사찰로, 본당인 백담사보다 먼저 만들어졌다. 오세암은 643년 창건됐으며 원래는 ‘觀音庵’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548년, 1643년 다시 두 차례 중건됐으며 해 이때 오세암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또한 한국전쟁의 참화를 이기지 못하고 모든 전각이 불타 없어졌으며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도윤스님에 의해 영시암과 함께 복원됐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오세암에 가면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전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오세암의 유래와 관련된 전설을 담고 있는 ‘동자각’이다. 산사의 이름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자 인간들의 소망이 투영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세암 역시 그러하다. 오세암은 1445년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매월당 김시습이 출가한 곳으로, 전국을 떠돌다가 49세 때 다시 돌아와 기거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오세암이라는 이름 역시 그의 별호인 ‘五歲神童’에서 유래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오세암과 관련된 보다 특징적인 이야기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이다.

“한 중이 부모 잃은 어린 조카를 암자로 데려와 키운다.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중이 월동 준비를 하기 위해 아이만 암자에 남겨둔 채 마을로 내려간다. 중이 양식을 구해 암자로 가려고 했으나 폭설 때문에 갈 수가 없어서 눈이 녹기만을 기다렸다. 이른 봄, 눈이 녹기 시작하자 중은 서둘러 암자로 올라갔다.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중이 아이에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묻자 어머니(관음보살)가 매일 양식을 주었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바람소리와 함께 나타난 백의선녀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경전을 주고 靑鳥가 돼 날아갔다. 아이가 오세에 득도했다고 해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부르게 됐다.”( 「오세암」,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국립민속박물관)
한없이 나약한 5살짜리 어린 아이가 몇 달 동안 홀로 남겨졌지만 신적인 대상에 의해 보살핌을 받고 끝내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오늘날 우리가 곧이곧대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어린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그 아이의 죽음을 통해서 생사병사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까닭에 오세암의 전설은 1990년 「오세암」이라는 同名의 영화로 제작됐고 재해석됐다. 여기서 홀로 남겨진 아이들은 우리가 알다시피 엄마가 있는 ‘하늘나라’로 떠난다. 현재 오세암의 전각 외벽에는 이와 같은 전설을 그대로 재현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산의 끝자락에서 사람들의 애환을 묵묵히 담아내다.

오세암을 나와 약 4-5시간 정도를 걸어 올라가야 최종 목적지인 ‘봉정암’에 다다를 수 있다. 봉정암은 설악산에 있는 여러 사찰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그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몸도 마음도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불자들은 백담사부터 영시암, 오세암, 봉정암에 이르는 코스를 가리켜 ‘순례자의 길’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걷고 걸어서 도착한 봉정암은 이들 암자 중에서 가장 아담하고 수수하다. 산에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오세암에서 느낄 수 없는 ‘소박함’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오랜 산행 동안 마음을 비웠기도 하겠지만 산맥의 거대한 바위 틈 가운데 움푹 파인 곳에 수즙은 듯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봉정암 전경’(인제군청 제공)
‘백담사 전경’(인제군청 제공)

 

봉정암의 역사적 기록은 판본에 따라 조금씩 달라 정확하지 않다. 우선,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신라 문무왕 시절인 667년에 원효대사가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만들었으며 고려중기인 1188년에는 보조국사 지눌이 이 암자를 참배하고 중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 암자는 자장율사가 643년에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창건했으며 667년의 원효가 중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어찌됐던 간에 백담사, 영시암, 오세암 그리고 봉정암은 모두 한국전쟁의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봉정암 역시 1980년대부터 복원된 것이다. 백담계곡으로부터 6시간 정도 올라와야 하는 이 깊은 산중도 한국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경내로 들어서면 아름답지만 동시에 봉우리 정상으로부터 깎아지듯 흘려내려 온 기암괴석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적멸보궁, 범종루, 객사, 공양간 등의 전각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 절에는 불상이 없다. 봉정암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보유하고 있는 ‘적멸보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명성은 자장율사의 창건설화에 따른 것이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귀국한 자장은 이를 모실 길지를 찾아 전국을 순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름다운 빛을 내는 봉황을 보고 이를 쫓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는 몇날며칠을 쫓아다녔다. 그런데 하루는 봉황이 어느 높은 봉우리를 만나 이를 선회하다가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자장이 가서 살펴보니 그 바위가 부처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봉황이 사라진 그곳이 바로 부처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이에 자장은 부처의 형상을 한 그 바위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뒤 사리탑을 세우고 암자를 짓고 이를 봉정암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봉정암 진신사리탑’(인제군청 제공)

그래서일까? 진신사리탑에는 아주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까이 다가서니 기단이 없는 독특한 구조에 조금 투박해 보이지만, 설악의 험준한 봉우리 사이로 세차게 몰아치는 비와 바람에 조금씩 자신의 살을 내어준 외로운 탑 하나가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부처의 사리가 있기에 어떤 사람들에게 이 탑은 경외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험난한 이 탑으로 찾아와 자신들의 소망을 빌고 인고의 삶을 견디어냈을까? 하지만 이 탑에서 우리가 느끼는 진짜 경외감은 부처의 사리보다도 그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면서 묵묵히 사람들의 애환을 같이 했다는 점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5대 적멸보궁
우리나라에서 부처의 사리를 보관하고 있는 ‘적멸보궁’은 이곳 설악산의 봉정암을 포함해 경남 양산의 통도사,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 태백산의 정암사, 사자산의 법흥사 등 모두 5곳이다. 이 사찰들을 우리나라의 ‘5대 적멸보궁’이라 칭하고 있다.


여행 Tip. 백담사-영시암-오세암-봉정암의 등반
① 당일치기의 Tip.
백담사-영시암-오세암-봉정암을 거치고 다시 백담사로 돌아오는 왕복길은 총 20.6km이른다. 구경하지 않고 바로바로 움직인다고 해도 소요시간이 대략 8-11시간 정도이다. 따라서 산행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 당일치기는 사실 힘들다. 그런데 백담사 셔틀버스 상행 첫차와 하행 막차 간의 시간 간격은 대략 10시간 정도니, 백담사에서 하산하기 위해서는 1시간 20분을 더 들여서 걸어 내려가야 한다.
② 1박 2일의 Tip.
첫째 날: 백담사-3.5km-영시암-7.1km-봉정암-0.7km-소청대피소(숙박)
둘째 날: 소청대피소-4.7km-오세암-6km-백담사
장소가 장소인지라 봉정암에서도 찾아오는 손님의 숙박을 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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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순 2018-05-12 08:06:14
봉정암사진은
백담사사진인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