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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 길 따라 옛 사람들 이야기 오늘도 흐르네
굽이굽이 길 따라 옛 사람들 이야기 오늘도 흐르네
  • 건국대 인문학연구원통일인문학연구단
  • 승인 2018.01.2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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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 6.화진포·수바위·울산바위·왕곡마을 효자각·연안김씨 열녀각·노상언 효자각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범박하게 생각해보자면,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사건이나 의견의 전달을 위해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 중에서 흥미를 끄는 ‘말의 조합들’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이런 ‘말의 조합들’이 이야기의 원형이 됐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람이 사는 곳에서 항상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전해지는 것이 이해된다.

그런데 이야기는 다양한 구성을 통해서 흥미로운 일들만을 전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는 재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경고, 교훈, 경외 등 다양한 생각과 감정들이 살아 숨 쉰다. 주변의 기이한 사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이야기, 위험한 장소에 대한 경고, 삶을 살아가며 경계해야 할 것들에 대한 교훈 등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얻게 된 다양한 경험들이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쌓여 있는 것이다.

어떠한 소재, 어떠한 형태를 띠고 있든 간에, 이야기를 만들고 전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느끼고 깨달았던 것들을 이야기 속에 담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남한 동부 최북단이라 할 수 있는 이곳 강원 고성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각자 자기의 매력을 뽐내며 살아가고 있다.

DMZ와 접경지역은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곳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전쟁과 분단을 상징할 이유는 없다.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상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DMZ와 그 접경지역이 전쟁과 분단이라는 사유의 틀을 벗어나 사람이 살아가는 곳으로서 자리매김해야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 항상 함께 존재하는 이야기는 DMZ 접경지역이 분단의 그림자를 벗어나 사람 사는 모습을 주목하게 한다. 이제 고성의 이야기가 보여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기대하며, 이야기를 따라 고성을 둘러본다.

화진포

부잣집이 잠긴 호수, 화진포

강원도 고성은 풍경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특히 빼어난 화진포 풍광의 아름다움은 이미 그곳에 세워진 별장들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경치가 얼마나 뛰어났기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별장이 이곳에 모여 있을까. 아름다운 곳, 경이로운 곳에는 이야기가 따라 붙는 법이다. 이곳 화진포에도 이화진이라는 사람과 그 며느리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이화진이란 부자가 살았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인색하고 성격이 고약했다. 어느 날 스님이 시주를 왔는데 곡식 대신 소똥을 퍼주었고, 스님은 소똥을 들고 말없이 돌아서 나갔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며느리가 얼른 쌀을 퍼서 스님께 드리며 시아버지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스님은 시주를 받으며 “나를 따라 오면서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며느리에게 당부했다. 그러나 고총고개에 이르자 시아버지의 집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무너졌고, 이 소리에 며느리는 그만 뒤를 돌아보게 됐다. 돌아보니 이화진이 살던 집과 논밭은 모두 물에 잠겨 호수가 돼 있었다. 이를 애통해 하던 며느리는 그만 그 자리에서 돌이 돼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착한 심성을 가진 며느리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겨 고총서낭신으로 모셨는데 이후로 근방의 농사도 잘 되고 전염병도 사라졌다고 한다. ‘화진포’는 이화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지금도 청정한 날에는 화진포 한가운데에 잠겨 있는 금방아 공이에서 누런 광채가 수면에 비친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사실 고성에만 전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인 ‘廣布說話’이다. 이야기 속에서 악행을 저지른 시아버지가 벌을 받고, 선행을 행한 며느리가 물에 잠기는 집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통해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벌을 받고 착한 일을 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선행을 하여 구원을 받은 며느리가 돌이 되어버리는 장면에서 숨을 멈추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며느리가 스님을 따라 나서 사고를 피한 것이 복이 아니라면? 오히려 스님을 따라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넘어섰을 때에 비로소 복을 받을 것이라면?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사람살이 속에서는 그러한 당연함이 지켜지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에 선한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지난한 일이며 그런 고난을 겪고 넘어서야만 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주변을 둘러싼 험준한 산세를 보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살아가면서 이 산세처럼 겹겹이 역경들이 닥쳐올 것이기에 한 순간의 선함이 아니라 꾸준하게 이어지는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지. 물론, 이야기를 듣고 해석하는 것은 듣는 사람 나름이다. 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듣고 말할 수록 다양한 의미들이 등장할 것이다. 화진포 이야기는 이야기의 재미를 맘껏 보여주는 듯하다.

수바위

쌀이 나오던 바위, 수바위

고성군 토성면에 있는 화암사 남쪽에는 왕관처럼 생긴 우람한 바위가 서 있다. 바로 수바위이다. 이 바위의 윗부분에는 항상 마르지 않는 웅덩이가 있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 지역에 비가 오지 않고 심한 가뭄이 들면 사람들은 이 바위에 와서 웅덩이의 물을 퍼 주위에 뿌리고 기우제를 지냈다.
지금의 화암사는 예전에 화엄사로 불렸다. 이 절은 산중에 있어서 항상 양식이 부족했다. 화엄사 앞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높고 널찍하여 스님들의 수행 장소로 쓰였다. 어느 날 바위에서 수행을 하던 두 스님의 꿈에 동시에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말했다.

"바위를 찾아보면 작은 구멍이 있다. 거기에 막대기를 넣고 세 번을 흔들면 두 사람이 먹을 만한 쌀이 나올 것이니라.”

꿈에서 깬 스님들은 서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 놀라 바위의 구멍을 찾았다. 이윽고 작은 구멍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곳에 막대기를 넣고 세 번을 흔드니 정확히 두 명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후로 스님들은 멀리 시주를 나가지 않아도 되었고 수행에 더욱 힘을 쏟았다.

한편, 화엄사에는 客僧이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두 스님이 신기한 구멍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막대기를 넣고 여섯 번 흔들면 두 배의 쌀이 나오겠지?’ 객승은 두 스님이 수행하지 않는 시간에 바위에 올라 구멍을 찾았다. 그리고서는 구멍에 막대기를 넣고 세 번을 흔드니 두 명분의 쌀이 나왔다. 세 번을 더 흔드니 또 두 명분의 쌀이 나왔다. 쏟아지는 쌀을 보고 신이 난 객승은 막대기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자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던 쌀이 다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구멍에서는 쌀 대신 피가 쏟아졌다. 그 후로 쌀구멍에서 다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로 수행을 하던 바위는 쌀이 나오던 바위라 하여 ‘穗’자를 써 ‘수바위’라 불렀고, 절의 이름도 ‘禾’자를 써 ‘禾巖寺’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수바위의 쌀구멍 이야기도 여러 지역에서 찾을 수 있다. 전국 각지의 기암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전하는 경우가 많다. 수바위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샘에서 물을 퍼다 사사로이 쓰지 않았다. 스님들은 한 끼 먹을 만큼의 쌀에 감사했고 더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安分知足의 가치가 수바위 이야기 속에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울산바위

금강산에 가지 못한 울산바위

고성의 바위 이야기를 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울산바위이다. 고성과 울산은 거의 400km(약 1,020리) 정도 떨어져 있다. 그 먼 곳에 있는 지명이 어찌 고성의 바위에 붙여졌을까? 사연은 이러하다.

옛날에 산신령이 금강산을 만들고자 했다.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을 만들고 싶었던 산신령은 고민 끝에 1만2천 개의 봉우리를 각자 다른 모양으로 만들면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금강산에는 그만큼의 바위가 없었고 산신령은 전국의 바위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이때 경상도 울산에 살던 울산바위도 자기 모양새를 뽐내기 위해 금강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덩치가 크고 걸음이 둔했던 울산바위는 금강산에 채 닿지 못하고 설악산에서 밤을 보내게 됐다. 하지만 금강산에는 이미 1만2천 개의 바위가 모두 도착했고, 울산바위는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됐다.

주변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이질적인 것들은 상상력의 보고가 된다. 전국에 금강산으로 향하다가 주저앉은 바위들의 갖가지 사연이 있는 것을 보면서, 고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질적인 바위를 보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어 나누며 잠시의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그려진다. 고성 사람들은 독특하고 웅장한 이 바위에 한참이나 떨어진 울산의 이름을 붙였다. 게다가 울산 원님의 욕심과 동자승의 통쾌한 복수마저 덧붙여 과욕을 경계하게 하고자 했으니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가 대단하다.

 

대대로 효자가 나는 곳, 왕곡마을

함희석효자각

고성 왕곡마을은 강원도 북부 지방의 가옥구조를 잘 보존하고 있는 전통가옥촌이다. 이 왕곡마을에는 효자각이 있다. 마을에 하나 세워지면 대단하다는 효자각이 두 개나 서 있다. 하나는 1820년에 세워진 ‘양근 함씨4세 5효자비’를 보존하고 있는 효자각이며, 다른 하나는 1869년에 세워진 ‘함희석 효자비’를 보존하고 있는 효자각이다.

왕곡마을에는 함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함성욱이라는 사람은 부친인 함취관이 병을 얻어 위독하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7일을 더 살게 했다. 함성욱의 아들 인흥과 인홍 형제는 아버지 함성욱이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3일을 더 살게 했다. 함인홍의 아들 함덕우 역시 부친인 함인홍이 위독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고, 함덕우의 아들 함희룡 역시 아버지 함덕우가 위독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연명하게 했다. 부모의 효성을 본받아서인지 함성욱의 아들과 손자들은 효성이 지극했고 결국 함성욱을 포함한 5명의 효자가 났다.

역시 이 마을에 살던 ‘함희석’은 부모가 병들자 보모의 몸을 보하기 위해 얼음을 깨고 바다로 헤엄쳐 나가 고기를 잡아올 정도로 효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집에 큰 불이 나 부모가 화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마치 부모의 수족처럼 느껴질 정도로 부모를 모셨다. 지극한 효심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명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는데, 부모의 상을 당하자 함희석은 3년의 시묘살이까지도 했다고 한다. 산신도 감동했는지 그의 시묘살이 3년동안 호랑이가 곁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왕곡마을뿐만이 아니다. 왕곡마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토성면 용촌2리가 나온다. 여기에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고, 남편 사후에 수절을 했던 연안김씨의 열녀비가 있고, 지혜롭고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며 선비다운 삶을 살고 효를 다했다는 노상언의 효자각이 있다.

효자 등의 단어에 감추어진 지배체제의 폭력성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것을 전하는 이야기 속에 과거의 사람들이 살아가던 삶의 한 모습이 담겨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여러 방향으로 생각할 거리가 많다. 부모와 자식은 천륜으로 묶여 있다고 하는데, 이들 효자의 행실 속에서 우리가 추구해온 보편적 가치를 확인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만 비각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실린 가치만큼 실제로는 보존이나 관리가 되지 않는 곳이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사람들의 삶에서 이야기가 조금은 멀어져 있다는 방증일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어떠한 목적에서 하나만을 강조하고자 노력하여도, 더 화려하고 자극적인 즐길 거리들이 있다고 해도 이야기 속에는 삶의 냄새가 묻어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항간에는 이제 이야기를 즐기는 문화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확실히 할아버지와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호롱불 밑에서 옛 이야기를 듣는 시절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둘러본  것처럼 고성의 몇명 이야기들을 따라다니기만 해도 만만치 않은 여정이 될 정도이다. 이야기가 여흥의 주된 자리를 꿰차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이 쌓아 놓은 역사와 문화의 바탕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오랜 시간을 전해온 이 이야기들이 산만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흐름을 이루며 일정한 형식을 따른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다. 비록 문자도 없던 시절에 만들어졌을 ‘말의 조합’은 중요한 사건들만이 나열돼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우리가 지금 듣고 즐기는 이야기들은 이야기 전체의 긴장감을 중심에 두고 그것을 고조시키기 위한 다양한 구성방법을 채택한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기-승-전-결’,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등 漸進的 구성을 이루기도 하고, 이러한 방식의 전형성을 타파하고 절정의 긴장감을 강화하기 위해 漸降的 구성이나 額子式 구성을 취하기도 한다. 또한 사건의 선후관계나 갈등의 진행 과정을 시간의 흐름과 반대로 말하는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이처럼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살펴보면 많은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옛 것만 말하지 않는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이야기로 남아 훗세대로 전해질 것이다. 옛 사람들이 재미와 교훈, 그리고 경계 등 삶에 필요한 많은 것을 이야기로 남겼던 것처럼, 우리는 전쟁과 분단의 상처가 남은 이곳에서 서로의 상처를 보다듬고 함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남겼으면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리 될 것이다. 이야기는 사람이 있는 한 함께 살아있기 때문이다.

 

건국대 인문학연구원통일인문학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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