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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을 차단하는 ‘문빠가 미쳤다’의 함의
논쟁을 차단하는 ‘문빠가 미쳤다’의 함의
  • 교수신문
  • 승인 2018.01.29 11:2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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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호-김명석의 필로폴리스_ 8. 민주주의와 의견 경쟁

‘미쳤다’는 말의 뜻

스피노자는 하느님이 없다는 생각을 품고 있는 이단 사상가로 비난 받았다. 그의 에티카를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가 하느님에 미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괴테는 스피노자를 하느님에게 취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미쳤다’는 말을 아주 많이 쓴다. 고흐는 그림에 미쳤다. 모차르트는 음악에 미쳤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은 빛에 미쳤다.

우리가 미치는 대상에 따라 그 ‘미쳤다’는 말은 때때로 최고의 찬사가 되기도 한다. “미쳐야 미친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마약, 도박, 미신 따위에 미치는 것은 나쁜 일로 여겨진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정신 질환을 겪는 사람에게도 ‘미쳤다’는 말을 쓴다.

서민 단국대 의과대 교수는 문빠가 미쳤다라는 글에서 ‘미쳤다’는 낱말을 ‘문빠’에게 썼다. 그는 마지막 문장에서 “문빠, 너희들은 환자야. 치료가 필요해”라고 말했다. 물론 그는 이른바 ‘문빠’들이 정말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면 ‘문빠’들을 비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윤리 관점에서 볼 때 매우 나쁜 짓이다. 그가 “문빠가 미쳤다”라고 말하는 것은 ‘문빠’들이 정말로 아픈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문빠’들을 그냥 비난하는 것이다.

논쟁에서 이길 수 없을 때 쓰는 몇 가지 반칙들

인간 문명은 생각들이 쌓은 위대한 건축물이다. 사람이 한 생각을 떠올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생각을 나누어 갖게 되면, 그 사람들은 그 생각대로 일이 벌어지게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현재 우리가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인간 문명이다. 과학기술 제품, 예술 작품, 옷, 음식, 집, 도로, 조직, 기구, 제도, 규칙, 나라 등 온갖 유형 및 무형의 구조물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생각들은 늘 경쟁한다. 말 또는 글로 써진 생각들이 여기저기서 지금도 경쟁하고 있다. 그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다른 생각들을 통제할 때 사상의 자유가 억압된다. 그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다른 말들과 글들을 통제할 때 언론의 자유가 억압된다. 사람들이 모여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게 할 때 집회의 자유가 억압된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 말, 글의 자유로운 경쟁이다. 생각들의 자유로운 경쟁이 더 참되고, 더 착하고, 더 아름다운 문명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것을 우리는 여태 경험해 왔다. “입 닥쳐!”나 “생각하지 마!”는 생각의 힘이 아니라 야만의 힘을 내세우는 구호다.

우리가 친구, 가족, 동료와 말이나 글로 생각을 나누는 것은 놀이나 여흥의 목적도 있겠지만 더 좋은 생각에 이르고 싶은 바람 때문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논쟁을 진선미에 이르게 하는 길로 여겼다. 논쟁은 단순한 언쟁 곧 말다툼과 구별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논쟁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냥 말다툼을 잘할 뿐인 이들 곧 소피스트들과 평생 다투었다. 논쟁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이들이 위험한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보이는 것에 속아 소피스트들이 마치 진선미에 이르게 해줄 사람인 양 믿게 되면, 우리 공동체가 타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소피스트는 논쟁 전문가라기보다는 논쟁에서 이기려고 온갖 반칙을 쓰는 데 능한 이였다.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논리를 갖고 말다툼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해 왔다. 그들은 논증법이 레토릭 곧 수사법과 어떻게 다른지를 탐구했다. 오늘날 세계 여러 대학들에서 배우는 ‘논리와 비판 사고’ 교양이 다루는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교양에서는 논리를 갖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게 말싸움하는 것을 ‘오류’라고 가르친다.

서민 교수가 문빠가 미쳤다에서 “문빠, 너희들은 환자야. 치료가 필요해”라고 말했을 때 “문빠, 너희들은 미쳤다”라고 말한 셈이다. 그가 이른바 ‘문빠’에게 “문빠, 너희들은 미쳤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그가 생각 경쟁 또는 의견 경쟁에서 그들과 논쟁으로 다투어보겠다는 뜻을 접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의견 경쟁의 상대자에게 “너는 미쳤다”라고 말하는 것은 논쟁을 그만하자는 의도이거나, 반칙을 써서라도 그 경쟁에서 이겨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빠, 너희들은 미쳤다”는 여러 가지 점에서 논쟁의 규범을 어기고 있다. 먼저 이 주장은 ‘우물에 독 타기’를 저지르고 있다. 여기서 우물은 말하는 이의 입 또는 그의 지성이나 마음을 뜻한다. 우물에서 샘이 솟듯이, 사람의 입과 지성에서 온갖 생각과 말이 솟아난다. 하지만 우물에 독을 타면 그 우물에서 나오는 그 어떤 물도 아예 먹을 수 없듯이, 사람의 지성에 독을 타면 그의 지성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과 말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논쟁 상대방의 지성에 독을 타서, 그 사람의 지성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곤 한다. 하지만 우물에 독 타기는 논쟁을 하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말싸움에서 이겨보겠다는 나쁜 수사법에 지나지 않는다.

“문빠, 너희들은 미쳤다”는 주장은 “너희는 문빠다”라는 주장을 이미 담고 있다. 여기서 ‘빠’는 ‘빠순이’나 ‘빠돌이’를 줄인 말이다. ‘문빠’라고 할 때 남자에게는 ‘문재인 빠돌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여자에게는 ‘문재인 빠순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빠’를 ‘오빠’할 때 ‘빠’라고 잘못 생각한다. ‘빠순이’가 ‘오빠순이’를 줄인 말이라는 설명은 ‘빠돌이’가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사실 ‘빠’는 특정 직업을 비하하는 유래를 갖고 있다. ‘빠순이’와 ‘빠돌이’는 바에서 일하는 호스트 또는 호스티스를 낮춰 부르는 말이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군 기지들을 중심으로 바들이 생겨나면서 바에서 일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그곳에 자주 출입하는 매매춘 여성을 ‘빠순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공장에 다니는 남성 노동자를 ‘공돌이’라고 낮추어 부르고 여성 노동자를 ‘공순이’라고 낮추어 부르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조어된 말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빠순이’와 ‘빠돌이’는 새로운 용례를 얻게 된다. 2001년 1월 10일 <한국일보>의 기사 ?‘빠순이’를 아시나요??에서 ‘빠순이’를 당시 HOT 같은 남자 아이돌 그룹의 극성 여성 팬을 비하하는 말이라면서 이 낱말이 ‘오빠부대’의 변형라고 잘못 주장하고 있다. 2002년 5월 15일 스승의 날 행사 때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회창이 강당에 모인 여고생들에게 지나가는 말로 “여러분들을 보니 명랑하고 ‘빠순이 부대’가 많은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그 무렵 이미 인터넷상에서 연예인이나 정치인을 열렬하게 지지하는 이들을 ‘빠순이’나 ‘빠돌이’라고 부르는 관례가 크게 늘어났다. 특별히 노무현 집권 기간 동안 ‘노빠’라는 용례로 크게 쓰게 됐다. ‘노빠’라는 낱말 자체 안에 이미 비난이 섞여 있기 때문에 그러한 낱말을 듣는 것만으로 충분히 조롱이 됐다.

2015년 6월 1일 김규항 작가는  사랑의 결핍이라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지난 몇 해 동안 노빠가 한국 정치를 얼마나 퇴행시켜 왔으며, 그래서 애꿎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해악을 끼쳤는가에 대해 굳이 더 반복할 건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한 정치인을 뜨겁게 지지하는 이들을 일단 ‘빠’라고 부른 뒤에 그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은 사실 비판이 아니라 힐난이다. “문빠, 너희들은 미쳤다”는 주장은 “빠돌이 짓과 빠순이 짓은 미친 짓이다”라는 주장을 몰래 감추고 있다. 그래서 “문빠는 미쳤다”, “노빠는 정치를 퇴행시켰다”, “노빠는 해악을 끼쳤다”는 주장은 듣는 이들에게 저절로 설득력을 미치는 마술을 부리게 된다. “빠순이 짓은 미친 짓이다”나 “빠돌이 짓은 정치를 퇴행시킨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문빠는 미쳤다”나 “노빠는 정치를 퇴행시켰다”를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수사법은 논리에서 ‘순환 표현의 오류’라고 한다. 노무현과 문재인 지지자의 그 행위가 왜 빠돌이 짓이고 빠순이 짓인지 그들이 논증한 적이 있었을까? 한 정치인을 단순히 뜨겁게 지지하고 사랑하는 것이 곧장 빠돌이 짓이고 빠순이 짓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순환 정의의 오류’라고 불리는 반칙을 저지르는 것이다.

논쟁할 때 논쟁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논쟁에서는 반칙이고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논쟁하는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그 사람이 주장하는 말의 내용을 따져야 한다. “너는 문빠니까 그렇게 주장하는 거야”라는 식으로 대화하는 것도 논쟁에서는 반칙이다. 이것은 “너는 여자니까 그렇게 주장하는 거야”나 “너는 비정규직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야”처럼 그다지 좋지 않은 수사법이다. 또한 그가 자신을 문빠라고 부른다는 이유에서 그가 빠돌이 짓이나 빠순이 짓을 한다고 곧장 결론 내려서도 안 된다. 이것은 마치 민주정의당이 민주주의와 정의를 좇는 정당이라고 곧장 결론 내리는 것과 같다.

왜 그들은 동료 시민을 빠로 모는가?

대화하던 동료 시민을 “미쳤다”라고 말함으로써 얻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를 비난하는 효과뿐만 아니라 그와 대화를 끝내는 효과 또는 그의 말문을 막는 효과를 얻는다. 우리는 미친 사람과 대화할 수 없다. 상대방의 행위나 말을 자기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가 미쳤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다. 말뜻 그대로 미친 사람은 환자이고 병원에서 돌봐주어야 한다. 하지만 힐난의 목적으로 “미쳤다”고 말하는 것은 곧 대화를 그만하고 싶을 때 또는 그의 말이 갖는 설득력이나 신빙성을 떨어뜨릴 때 쓰는 말이다.

아카데미즘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은 ‘미쳤다’는 말을 매우 신중하게 써야 한다. 지식인들은 폭력으로 자기주장을 관철해온 야만의 역사를 바꾸려고 논쟁으로 의견을 경쟁하는 방식을 만들어왔다. 학교, 학회, 학술원, 학술지, 언론 등은 그러한 의견 경쟁이 이루어지는 무대이다. 그 경쟁에서 우리는 이성의 규범을 따르도록 훈련 받는다. 논리란 그러한 이성의 규범을 일컫는다.

사람은 짐승이지만 짐승의 유전자와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의 명령과는 다르게 생각할 이유를 찾아냄으로써 이성을 갖춘 존재로 자라났다. 상대방의 발화나 표현에 이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갖추지 못한다면, 자기와 다르게 말하는 이들이 정신이 나갔거나 이성이 없거나 미쳤다고 보이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그가 되도록 참말하고 싶고 착한 짓을 하고 싶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은 이로 여기면서 대화해야 한다는 원칙을 “사랑의 원칙”이라고 한다. 여기서 ‘사랑’은 영어의 ‘채러티’를 옮긴 말인데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된 뜻들 가운데 “다른 사람의 뚜렷한 허물과 단점을 참작함으로써 그들의 성격, 목적, 운명을 다정하게 또 희망을 갖고 판단하는 성향”을 뜻한다. 이를 ‘자비’라고 옮기는 사람이 있고 ‘관용’이라고 옮기는 사람도 있다. 옥스퍼드 사전은 저러한 뜻이 나오게 된 원전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은 다른 이가 잘못될 때 결코 기뻐하지 않으며, 사랑은 옳은 것이 널리 퍼질 때 늘 기뻐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김규항은 사랑의 결핍에서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사랑의 결핍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라고 썼다. 여기서 그들은 ‘노빠들’이다. 오히려 동료 시민에게 빠라고 말하거나 미쳤다고 말하는 것이 사랑의 결핍이다. 왜 그들이 ‘빠짓’을 하고 있는지 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하려고 거의 애쓰지 않은 채, 그들을 조롱하고 힐난하며, 그들의 입을 막고 자기 귀를 막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동료 시민들을 사랑하되 우리 귀를 열고, 그의 입을 열게 하고, 그 말의 내용을 따져 물으며, 함께 더 나은 생각과 더 나은 행위를 모아 더 나은 사회로 가는 지혜를 얻는 과정이다. 민주주의에서 사상과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중요한 것은 그 자유의 공간에서만 자유로운 의견 경쟁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서로 욕하면서 말로 험하게 싸우더라도 상대가 미쳤다고 쉽게 말하지 않도록 하자. 힐난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비판하려면 먼저 상대를 사랑해야 한다. 사랑할 마음이 없으면 차라리 대화를 멈추고 침묵하는 것이 낫다.

 

 

김명석 /국민대 교양대학·철학
물리학을 공부한 다음 언어철학 및 심리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북대 기초과학연구소, 중앙인사위원회 등에서 일했으며, 현재 국민대 교양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후기 분석철학의 인식론과 언어철학, 언어와 사고의 기원, 자유의지와 마음의 힘, 뜻 믿음 바람 행위의 종합 이론, 양자역학의 존재론 해석을 주로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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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2018-02-02 00:56:35
토론할 때 욕하지 말자는 말을 길게 써놓으셨군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