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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의 모든 문제를 한 권에 담기까지
‘혐오표현’의 모든 문제를 한 권에 담기까지
  • 홍성수 숙명여대·법학부
  • 승인 2018.01.29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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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말이 칼이 될 때』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64쪽

학자의 꿈을 키워갈 당시에만 해도 대중서를 쓸 생각은 해본 적은 없다. 묵직한 학술서를 내는 학자의 모습을 늘 상상했고, 대중서를 내는 건 학자답지 않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나의 첫 단독 단행본은 대중서가 됐다.

2013년 한국에서는 일간베스트 게시판이 크게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때 처음 ‘혐오표현’(hate speech)이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소수자를 멸시하거나 모욕하는 표현을 혐오표현이라고 칭하고 형사처벌한다는 사실이 소개된 것이다. 나는 그 때 인권·시민단체들과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정책 제안’ 보고서 작성을 함께 하고 있었고, 표현의 자유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다. 혐오표현은 표현의 자유가 옹호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규제돼야 하는 문제였다. 이렇게 한계영역에 있는 문제만큼 학문적으로 흥미로운 것이 또 있을까? 그 때부터 혐오표현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관련 문헌을 닥치는 대로 읽어가기 시작했고, 혐오표현 피해자들을 만나 얘기를 들었고, 국가인권위원회 혐오표현 실태조사 연구용역에 연구책임자를 맡기도 했고, 학술대회나 세미나에서 발표를 하고 논문을 출간했다. 뜨거운 이슈다 보니 언론 기고와 인터뷰도 수없이 했고, 수시로 혐오표현 강연에 불려 다녔다. 하지만 무언가 공허했다. 혐오표현은 한 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인데다가, 해법도 간단치 않다. 짧은 인터뷰나 기고는 말할 것도 없고, 2시간 강연에서도 내 생각을 온전히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전문적인 연구서를 염두에 뒀지만, 출판사로부터 혐오표현 대중서를 내보자는 제안을 받고 생각이 바뀌었다. 혐오표현은 학문적으로도 흥미로운 주제지만, 대중들이 일상생활에서 늘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중들과 내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더 뜻 깊은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중서를 내기로 한 이상 나는 반 쪽짜리 전문가였다. 어떻게 해야 ‘대중적’일 수 있는지에 관한 한 편집자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했다. 그렇게 나는 편집자와 ‘함께’ 책을 써나갔다. 처음에는 기존 논문을 윤문하는 식으로 작업했지만, 그래 가지고는 조금 더 쉬운 논문이 될 수 있을 뿐이었다. 결국 완전히 다시 쓰기 시작했다. 논문의 한 단락을 보고, 대중서에 맞는 표현과 설명방식을 고민해 다시 타이핑하는 식으로 말이다. 알기 쉬운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고 사례들을 곳곳에 첨부했다. 이해를 돕기 위한 표와 그림도 넣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점점 대중서의 꼴을 갖춰갈 수 있었다. 결국 27쪽에 이르는 학술문헌들로 가득한 후주에 근거하면서도, 본문은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춘 책 한 권이 완성됐다. 기획부터 출간까지는 2년 가까이 걸렸지만, 실제 집필에 집중한 것은 6개월 정도였다.

전문연구자의 대중서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깊은 학문적 이해를 바탕으로 대중들의 눈높이에서 풀어낼 때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의미의 대중서를 쓰려면 그 분야에 정말 정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사실 쉽게 쓰는 건 학문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다. 쉬운 예시를 들려면 그 분야를 정말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과감하게 단순화시키려면 그 단순화에 오류가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감행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아직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해야 했지만, 5년 넘게 혐오표현 연구에 매달렸던 덕분에 확신까지는 아니어도 자신 있게 책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혐오표현의 모든 문제를 한 권에 모두 담는 것을 목표로 했다. 혐오표현의 개념과 유형, 해외 사례, 역사부정죄와 증오범죄 등의 관련 쟁점, 법적 대응과 사회적 대응, 정치인의 역할, 그리고 우리 사회의 과제까지 포괄적으로 다뤘다. 편집자의 제안으로 맘충, 영화 청년경찰,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등 최근 한국사회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논평을 박스글 형식으로 삽입했다.

앞부분에서는 혐오표현 개념을 설명하는데 꽤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한국사회에서 혐오표현 담론이 꼬인 것은 혐오표현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 바가 컸기에 이 문제부터 풀어야 했다. 나는 ‘광의의’ 혐오표현 개념을 선호한다. 가벼운 농담부터 직접적인 폭력을 부르는 증오선동까지 혐오표현의 범주에 포괄했다. 아무리 사소한 표현이라고 해도 그 위험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누적되면 차별과 폭력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개념 설정이 필요했다. 또한 혐오표현은 맥락에 따라 달리 정의될 수밖에 없기에 맥락에 따른 이해가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속 시원하게 혐오표현 여부를 가려주는 ‘감별사’보다는, 각자 스스로 혐오표현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게 도와주는 ‘안내자’가 되고자 했다.

문제는 혐오표현을 광의로 개념정의할수록 단일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그 많은 혐오표현의 사례들을 모두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김치녀나 맘충 같은 말도 혐오표현이 될 수 있지만, 이런 말을 한 사람을 모두 감옥에 넣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법과 사회에 대한 내 관점이 투영됐다. 나는 법과 규제가 실제로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연구해왔다. 법 이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기제들이 사회를 규제하고 있으며, 법은 그런 기제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기본적인 관점이다. 여러 영역에서, 법적 규제의 ‘한계’나 ‘부작용’에 주로 착목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혐오표현의 경우에도 다양한 대응이 가능하다. 법규제만 해도 형사처벌, 민사배상, 차별시정 등의 행정조치가 있고, 교육, 홍보, 정책, 지원, 연구를 통해 개입하는 방법도 있고, 기업이나 대학 등 개별 조직에서의 자율적 규제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방법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돼야 함은 물론이다. 책에서는 각 규제방법들의 장단점을 상세하게 기술함으로써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논의해볼 수 있는 기초자료를 제시하고자 했다. 이것은 형사처벌 여부로 단순화된 기존의 논의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동안 논의가 형사처벌에 관한 찬반으로 협소화된 경향이 있었지만, 형사처벌은 여러 대응방법 중 단지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책에서는 형사처벌이 얼마나 제한적인 효과만을 낳을 수 있는지를 상세하게 규명하고자 했다. 그래야 다른 다양한 규제방법들로 눈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정에 없던 대중서를 출간하고 한 달 쯤 흐른 지금, 결과적으로 매우 만족스럽다. 언론에서도 꽤 화제가 됐고 독자들의 반응도 흥미롭다. 논문 게재는 말할 것도 없고, 강연이나 언론 기고를 했을 때하고도 차원이 다른 세계와 만난 느낌이다. 논문과 강연으로는 교류할 수 없었던 전혀 다른 배경의 독자들에게 읽혀지는 듯하다. 책이라는 매체의 위력을 세삼 느끼고 있다. 논문을 쓰고 강단에 섰을 때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언가를 경험하고 있다.

 

홍성수 숙명여대·법학부

런던정치경제대에서 박사를 했다. 저역서로 『혐오표현의 해악』(공역), 『법철학연구』(공저) 등이 있으며, 한국법철학회, 한국법사회학회, 한국인권학회, 인권법학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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