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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勢東漸으로 시작된 동양의 근대화에서 드러난 사고의 차이
西勢東漸으로 시작된 동양의 근대화에서 드러난 사고의 차이
  • 교수신문
  • 승인 2018.01.2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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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동서 문명과 근대’_ 제1강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동양, 서양, 근대-일치와 차이」

네이버 ‘열린연단’의 다섯 번째 강연 시리즈 ‘동서 문명과 근대’가 진행됐다. 동서양 근대성의 한계와 가능성을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검토하는 강연으로 2018년 총 50회 강연이 예정돼 있다. 1월에 열린 3개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해 소개한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사진 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사진 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동양과 서양 그리고 근대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묶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 하고 의아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 항목의 상호 관계는 우리의 현실을 살피고자 할 때, 특히 역사적인 관점에서 크게 살피고자 할 때, 피할 수 없는 관심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이 세 항목은 분명하게 다른 지리 영역과 문화 영역을 가리킨다. 그러면서도 이 세 가지가 서로 섞이면서 오늘의 세계?특히 오늘의 동아시아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충돌하고 융합하여 형성된 것이 동아시아의 현재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제 실크로드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화제가 되는 것을 본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호기심을 넘어, 동아시아가 서양에 대하여 대등한 관계로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전에도 동서의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마민족의 이동이 커다란 역사적 변동을 가져왔다는 관찰도 있고, 또 그전에는 오늘의 국경이나 민족의 경계가 없었고 동아시아가 보다 넓은 유라시아 대륙의 넓은 공간의 일부였다는 관찰도 있다. 또는 수십만 년을 소급하여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인류가 확산하면서 유라시아가 인류의 거주지가 되었던 과정에 대한 관심들도 생겨났다.

어쨌든 이제 동아시아라는 것이 근대 또는 현대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됐다. 그전의 시대에 선진 후진의 구별은, 그것이 정당하든 아니하든,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구분이었고, 후진은 선진을 따라잡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이제 후진이라고 생각되던 동아시아는 그러한 구별을 넘어 현대 세계에 들어서서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그리고 문명권의 전체가 아니라 한 나라만의 선진화는 문명권 전체, 그곳의 문명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한 나라의 예외적인 발전은 말하자면, 독자적이라기보다 다른 문명의 진보에 편승하여 생기는 이점으로 보이기 쉽다.

근대화는 서양에서 시작된 西勢東漸에 대한 불가피한 반응이었다. 서양의 동점은 그 내적인 힘?군사력, 정치, 경제, 문화에 있어서의 내적인 힘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또 그것은 그 나름의 인간 집단의 삶의 한 형태?불가피한 형태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면서 또 적응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 그 진출은 말할 것도 없이 충돌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융합으로 변용됐다.

동서양의 사고의 원형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주축 시대의 사고 혁명에서 대두한 반성적 사고의 중심에 있는 ‘초월자’ 또는 ‘초월적 차원’에 관련돼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이성은 어떤 장애도 극복하면서 세계에 대한, ‘격렬한 지적인 의지’로 존재하지만, 초월자에 직면해 난파한다.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이러한 난파의 불가피성으로 하여 이성의 작업은 계속되기도 한다. 논리적 사고는 대상으로서의 사물을 보다 큰 사물들의 질서에 포함하는 이론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이론은 점점 더 포괄적인 체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 또는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적어도 가능성으로는 전체성에 이르기를 意志한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적 사고가 논리를 넘어가는 초월자에 부딪는다면, 그 작업을 포기하거나 또는 다른 방법으로 해석의 작업을 새로 시작할 도리밖에 없다. 그렇게 하여 계속되는 작업에서 전체성은 보다 큰 범위의 것이 된다. 그것은 무한이 되고 초월자가 된다.

세계에 대한 반성적 사고는 결국 전체성을 상정한다. 다만 그 전체성이 무엇인가가 애매할 뿐이다. 그리고 초월자를 포함하는 전체성은 전체성에 이르지 못하는 무한한 연속성이 될 수 있다. 또는 그것은 무한으로 열리는 전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초월자의 개입으로 하여 무한한 도약의 가능성을 가지게 된 것이 주축 시대의 반성적 사고라고 한다면, 이것은 대체로 서양에 해당되고 동양에서는, 반성적 사고에의 도약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같은 가능성을 볼 수는 없다는 견해가 있다. 아시아에 있어서의 그러한 도약은 초월자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사고의 무한한 진행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한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전체성으로 열리는 것이다. 영국의 중국학자 멜빈 교수는 중국 사상에 초월적인 것이 있었다는 관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또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는 주장을 비친다. 그러나 계속되는 사고에서 사고의 결과를 전체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것-전체적인 것은 존재했다. 모든 판단은 연역, 귀납, 歸推(abductive reasoning), 어느 것이든지 간에 판단의 대상은 일단 또는 究極的으로 큰 범주로 연결된다. 이때 사고는 반성적 사고의 무한성이나 구체적 사실의 전체성으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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