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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사회적 쾌감
인간의 사회적 쾌감
  • 유명기 경북대
  • 승인 2003.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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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인간이란 참 희한한 동물이구나 새삼 느낄 때가 있다. 야생동물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노라면 특히 더 그렇다. 예컨대, 거의 모든 야생동물의 수컷들은 발정기가 되면 문자 그대로 사생결단으로 싸운다. 이긴 수컷은 암컷들을 독차지하며 자신의 우수한 유전자를 퍼뜨림으로써 무리의 생존능력을 향상시킨다. 반면, 인간은 어떠한가. 모든 인류사회에서 짝짓기의 기본은 일부일처제다. 우수하고 강한 자만이 자손을 보라는 법은 없다. 바보든 현자든, 가난뱅이든 부자든, 양상군자든 도덕군자든 사람은 저마다 짝을 찾아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기회를 갖는다. 당연히 칠칠치 못한 자들이 적잖이 태어나 사회에 폐를 끼친다.    

약자에 대한 대우는 어떤가. 동물의 세계는 늙거나 병들고 다친 개체들을 애써 보호하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오히려 포식자들의 먹이감이 되게 함으로써 무리 전체의 안전판으로 삼는다. 인간의 경우는 다르다. 인류사회라고 하여 다치고 병든 자나 늙은이를 반드시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것은 아니되, 그래도 약자를 보호하며 늙은이를 공경하는 것이 일반적인 규범이다. 동물세계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류사회는 이 쓰잘 데 없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비교하자면, 동물의 세계가 종의 존속과 적응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강한 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며 끝없는 우생의 원리가 지배하는 優勝劣敗의 원칙에 철저한 원초적 경제주의의 세계라 한다면, 인류사회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비효율과 비경제적, 낭비적 사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4백만 년 동안 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류가 다른 동물들보다 월등한 진화의 성적표를 자랑하고 있다. 적어도 거시적인 진화의 구도에서 보자면 적나라한 경제주의 아닌 어떤 비효율적, 비경제적 행동원리들이 인류라는 종의 적응과 진화에 순기능을 해 왔던 것이다.

인류의 성공적 진화발달을 가능하게 해 준 핵심은 강자의 독점이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분배와 공유라는 행동원리였다. 앞에서 언급한 성의 나눔과 함께 먹이활동도 그러한 인류의 행동특성이 돋보이는 활동 중 하나인데, 영장류학자들은 인간은 초기인류사회에서부터 식량채집자 개인이 필요한 이상의 식량을 채집하는 경향이 있었음에 주목한다. 인류는 채집한 식량을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무리의 다른 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일정한 장소로 운반하며, 운반된 식량을 정해진 규칙에 따라 무리 사이에 분배해, 함께 먹는다. 침팬지나 고릴라 등 다른 고등영장류의 경우 음식은 오직 구걸을 통해서만 이따금씩 다른 구성원들에게 분배된다. 영장류 가운데는 인류만이 유일하게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의지에 따라 음식을 나누며 함께 먹는다. 

다른 동물에서는 경쟁과 갈등의 원천이었던 먹이나 성을 분배와 공유의 사회적 자원으로 승화시킨 것은 인류의 발명이었다. 인류는 이처럼 개체간의 우열이 노출되기 쉬운 성이나 먹이를 공유와 분배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제도의 차원으로 승화시킴으로써 내적 통합을 이루고 종 전체의 적응능력을 강화시켰다.

인류사회에서의 먹이와 성의 분배는 단순히 서로가 준 것을 돌려 받는 이기적인 호혜성 게임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욕망을 자기의 것과 동일시하며 공감하는 ‘타자와의 일치’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며, 체험의 공유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상대를 자기와 동등한 존재로 인식해, 그 동등한 입장끼리 상호행위가 가능한 타자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쾌감의 근원이다. 이러한 쾌감에 대한 갈구는 인류 심성의 보다 깊은 근원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며, 오랜 진화의 역사를 통해 인류가 성공적인 적응을 달성할 수 있었던 바탕이기도 했다.

효율성과 능률의 추구를 지상명제로 삼는 경제주의의 담론이 횡행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분배와 공유를 전제로 성공적으로 적응해 왔던 인류라는 위대한 종의 진화사를 되돌아보는 의미는 적지 않다. 강자가 그 우성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적나라한 경제주의 논리가 판치는 한, 우리 인류는 언젠가는 또다시 TV화면의 야생동물처럼 벌거벗은 원숭이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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