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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떠돌아다닌 1천500년 전 불상…공적 보호 시급하다
25년 떠돌아다닌 1천500년 전 불상…공적 보호 시급하다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
  • 승인 2018.01.03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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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67.백제금동반가사유상(百濟金銅半跏思惟像)의 再照明

半跏思惟像은 석가모니가 出家하기전인 太子시절에 인생무상을 느끼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뜻을 품고 고뇌하는 모습에서 유래된 불상이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걸터앉아 한쪽다리를 무릎위에 걸치고 한손의 팔꿈치를 걸쳐놓은 다리의 무릎위에 올린 상태에서 손끝을 뺨에 살포시 대어 깊은 고뇌에 잠긴 듯한 모습을 표현한 보살상이다. 인도에서는 3세기경에 반가사유상이 처음으로 협시보살상으로 조성됐으며 중국에는 ‘太子思惟像’이나 ‘思惟像’으로 제작됐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6세기~7세기경)에 유행했으며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형상이지만 불교 교리의 발전에 따라 석가모니가 열반 후에 인간세계에 나타나서 모든 衆生을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하려는 미륵불의 신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반가사유상이 彌勒佛이라는 명문이나 문헌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서산마애삼존불’처럼 협시보살로 등장하는 근거로 미륵불로 추정도 가능하다).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은 여러 불상의 형태 중에서도 빼어난 조형미를 품고 있으며 석가모니의 고뇌하는 순간을 표현한 극적인 순간을 가장 잘 묘사한 작품으로 높은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국내에 현존하는 반가사유상은 약 40餘軀가 전해진다. 그중 金銅으로 제작된 것은 25軀정도 이지만 명확하게 백제시대에 제작된 금동반가사유상은 국내에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사진1)의 판불상이 전북 김제의 절터에서 출토돼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1993년 10월의 가을날에 충남 부여에서 운수업에 종사하던 R씨(당시50세)는 비가 그친 다음날 부소산에서 산길을 산책하던 중에 우연히 금색 찬란한 불상 1구를 씻겨 내려간 흙더미 속에서 발견한다. 부소산은 1919년에 금동여래입상(보물 제196호)이 발견됐고 석조반가사유상의 일부(부여국립박물관)가 발견되기도 했다. 백제 궁궐의 안에 있던 부소산은 왕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건물지와 절터가 아직도 남아있다(불상의 정확한 수습 위치는 사비루 아래의 망대지 부근에 있는 건물지 부근이다).

1994년 5월 R씨가 국립부여박물관에 부소산에서 수습한 불상을 신고해 발견된 불상은 서울로 옮겨졌고 관련기관에서 감정을 거친 결과 이상하게도 “근래에 만든 공예품으로 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없다”고 결론이 내려져 부소산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반가사유상’은 바로 R씨에게 반환됐다. 단번에 ‘근래에 만든 공예품’으로 전락한 ‘백제금동반가사유상’의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 되는 순간이었다. 최초의 발견 수습자인 R씨는 이 불상을 알아보는 금속전문 골동품 상인에게 불상을 매도했고 기구한 운명의 불상이 돼버린 ‘백제금동반가사유상’은 국내외 여러 기관 및 관련 학자들과 遭遇하게 된다.

이 불상을 鑑定한 故 鄭永鎬 교수는 <문화사학>(1995년 6월 제3호)에서 「백제금동반가사유상의 신례」라는 제목으로 이 불상이 진품임을 증명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 후에는 거의 모든 관련 전공자들이 심사숙고하고 재심해 이 불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광복이후 최초로 출토지가 확실한 유일한 ‘백제금동반가사유상’이 국가의 보호아래 편안히 자리 잡는 듯했다. 그러나 부소산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반가사유상’의 여정은 여기에서 멈춘다. 수많은 사연을 품은 불상은 다시 개인 소장자에게 賣渡되고 세월이 흘러서 어느덧 발견된 지도 25년차에 이르고 뜨거웠던 관심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항간에 들려오는 바로는 국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여 국외로 반출돼 매각됐다는 가슴 아픈 소문도 들렸었다.

최근에 필자는 지인을 통하여 희소식을 접하게 됐다. 행방이 묘연했던 부소산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반가사유상’이 아직 국내의 정직한 所藏家 손에 잘 보관돼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20여년 만에 다시 불상을 實見하게 됐다.

높이 19cm의 아담한 불상을 보는 순간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고 눈을 떼지 못했다. 감격의 순간이 바로 이런 때 일 것이다.(사진2)~(사진7)

‘백제금동반가사유상’의 얼굴은 계란형으로 약간 올라간 눈꼬리와 기다란 눈썹, 아직도 붉은 입술의 옅은 미소(사진8)는 삼국시대 불상의 공통분모인 근엄함이 사라지고 천진난만한 개구쟁이의 얼굴이 들어와 있다(첫 번째 위작일 수 없는 이유).

왼발 무릎위에 걸친 오른발의 긴장한 엄지발가락(엄지발가락만 힘을 주어 올라와 있다, 사진9)은 백제불상으로 알려진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금동반가사유상’(사진10)의 엄지발가락과 일치한다(두 번째 위작일 수 없는 이유).

(사진11)의 머리뒷면에는 頭光을 끼웠던 네모난 돌기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세 번째 위작일수 없는 근거) 불상의 속은 허리부분까지는 청동으로 채워져 있고 하반신은 속이 비어있으며 도금을 하지 않아서 부분적으로 산화돼있다(사진12).

불상의 재질에 대한 분석은 이미 국내외의 유명 기관에서 6세기~7세기의 금속으로 확인 받은 바 있고 불상의 세밀한 연구결과도 先學들이 이미 발표해 미처 언급하지 못한 부분만을 몇 가지 나열했다.

백제의 수도인 부여 부소산에서 우연히 발견된 ‘백제금동반가사유상’은 국내 유일한 불상이다. 1천500년 만에 빛을 본 불상이 후손 앞에 모습을 나타낸 지 25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도 後孫의 國家에서 공식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개인의 품에서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이제는 과거의 성급했던 과오를 탓하기 보다는 미래를 생각해야할 때이다. 관련기관에서는 하루속히 국보급 유물의 생명력이 꺼지지 않도록 능동적인 조치를 취해서 우리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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