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3:50 (금)
순례자의 마음으로
순례자의 마음으로
  • 이진경 충북대 학술연구교수
  • 승인 2017.12.26 11: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문후속세대] 이진경 충북대 우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그나마 드문드문 나가던 교회를 그만 나가겠다고 생각했던 때가 고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게을러서 일요일 예배에 성실하게 나가지 않았던 데 대한 변명을 찾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몇 해 전에는 부흥회에 나가 울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날 나는 열정적이고 은혜로운 분위기 속에서 어린 순례자나 신의 홍위병 같은 치기어린 용기가 생겼었다. 그러나 오래된 내심에서는 여전히 신도, 인간의 세상도, 나 자신도 공식만 외우는 수학문제처럼 납득하기 어렵고 콜럼버스의 항해처럼 막막해서 혼란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 순간에는 감정의 혼란 속에서 솔깃한 감동이 우세하게 작동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부흥회 동안 신을 회의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나름 신이 존재한다고 논증해 보려던 그 이전의 이성적 노력들이 유치하게 느껴졌던 그 순간에, 나는 신과 교회와 선량하고 열정적인 간증자들을 신뢰했고, 나의 각오와 감동이 작은 교회 건물 하나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날 신의 보편타당한 진리와 절대적 사랑을 향해 치솟았던 열정적 신념은 오래지 않아 일상의 느슨함과 논증되지 않는 신의 진리값 사이에서 흩어졌다.

고등학교에 올라간 뒤 마침내 나는 의심을 숨기고 있는 게으른 신자 생활을 청산하기로 마음먹었다. 신의 규율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의지로써 인간의 길 위에서 살아가 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리고 한참 뒤에까지도 ‘욕망으로써’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방향을 찾거나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등의 암중모색이란 것도 해보고, 확신과 선택한 것에 대해서 라만차의 돈키호테처럼 달려가면서 그 노정에서 반드시 자신이 마련한 말과 갑옷을 사용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만약 신이 있어서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이렇게 저렇게 용감한 시도를 했다는 1인1우주의 모험담을 흥미롭게 듣겠지. 신의 혜량을 가졌으니 설마 손가락 끝으로 간단히 튕겨버리지는 않겠지. 나의 인문시대는 일상의 게으름과 신과 종교에 대한 회의주의 속에서, 그리고 혜량할 길 없는 신의 아량 위에서 선언됐다.

그러나 호기로웠던 나의 인문시대는 즐겁지 않았다. 세계와 자신에 대한 막막한 호기심을 풀어줄 것 같은 철학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가, 현실적 효용성을 고려해서 월급 받는 엔지니어가 되었다가, 나이를 먹은 뒤에야 비로소 늦은 철학공부를 시작했다. 동양철학을 공부했는데, 해갈 혹은 오락처럼 시작한 철학 공부는 처음과 달리 갈수록 어려웠다. 졸업을 한 뒤 한국연구재단에서 박사후국내연수 지원과 학술연구교수 지원을 받아 한국도가사상사를 연구해오면서 연구가 즐겁고 성과에 기뻐하기도 했지만, 날마다 얄팍한 밑천을 확인해야 했고 자주 탁월하지 않아서 좌절에 빠졌다. 공부시간이 쌓여갈수록 강의와 연구의 험난함은 점점 더 큰 산으로 자랐다. 인접한 산들이 새롭게 발견되고 선행자가 없는 길 앞에 서게 되면 날마다 증식하는 산과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길 앞에서 탄식하는 자신을 대면하게 된다. 성실하지 않아서 죄의식에 자학하고, 중간중간 공부는 행복하지 않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한없이 가벼운 지적 능력으로 버거운 사유를 하다보면, 영성에 대해 열패감을 느끼기도 한다. 다시 믿음의 세계로 돌아갈까?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 길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제 눈으로 보아야만하고 제 스스로 가야만 하는 호기심과 모험심이라는 본성 때문이다. 여전히 신과 세계와 인간은 수학문제처럼 납득하기 어렵고 콜럼버스의 항해처럼 막막하고 나는 혼란과 두려움 속에 서 있지만, 이 우주에서는 베른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궁극적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이다. 그리고 위안이 되는 것은 큰 산들 가운데에서 자기만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진경 충북대 우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충남대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했다. 한국도가사상사와 조선후기 도가사상사-박지원, 정조, 이익 등의 도가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