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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당시 조선인의 생활상은?
중일전쟁 당시 조선인의 생활상은?
  • 윤상민
  • 승인 2017.12.26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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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중일전쟁·난징대학살 80주년 학술회의 개최

1937년 7월 7일, 일본군 이등병 한 명이 행방불명된 사건을 구실로 중일전쟁을 선포한 일본은 그해 12월 13일 난징을 점령했다. 중국군이 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일본군은 포로와 민간인을 포함해 30만여 명을 학살했다. 난징대학살이라 불리는 이 전쟁범죄는 냉전 등의 원인으로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졌다가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으로 다시 주목받게 됐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소장 이종화)와 한국사연구소(소장 박대재)가 지난 15일 개최한 중일전쟁·난징대학살 80주년 국제학술회의에서는 당시 궁핍했던 조선인의 삶이 의식주 측면에서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송규진 고려대 교수(한국사학과)가 발표한 「일제의 중일전쟁 도발과 병참기지정책」의 주요 부분을 요약·발췌했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고려대 아세아연구소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가 공동주최한 중일전쟁, 난징대학살 80주년 국제학술대회 현장
고려대 아세아연구소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가 공동주최한 중일전쟁, 난징대학살 80주년 국제학술대회 현장

 

중일전쟁 시기에 조선인은 동복을 따로 착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으며 그나마 ckryddgks 경우도 대부분 자가제조한 것이었다. 원래 조선농촌에서는 면을 재배하고 직조해 옷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면포가 수입되자 자급자족적인 체제는 붕괴됐지만 1935년까지도 집에서 제조한 의복을 많이 입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공동판매제가 강화되고 1939년에 공판제가 의무화하면서 남부조선의 육지면산지는 가내소비가 제한됐고 서부조선과 북부조선의 재래면산지도 가내 제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자가소비가 금지되고 타면기 등도 사용하기 어려워 면포 수직을 못하게 되자 의복 사정은 더욱 곤궁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상복과 외출복의 구별 없이 살았다. 계절에 따라 조금 달랐지만 외출복을 다로 갖고 있는 사람은 평균적으로 봄과 가을에는 10명당 2명, 겨울철에는 10명당 4명 정도의 비율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1학 내외 정도만이 의류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9할 전후의 통상복은 누더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물자통제, 의류통제로 설사 생활에 여유가 있더라도 의복을 구입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일제하 조선의 겨울철 추위는 요즘보다도 매섭고 온난의 차도 더 컸다. 이 때문에 의복은 생명유지를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결국 최소한의 의복조차 제대로 갖출 수 없었던 겨울철에는 동사자가 속출했다.

중일전쟁 이후 전시 식량문제가 심각해진 상황에서 발생한 대한해로 인해 조선에서는 식량공급이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 1939년 식량에 대한 본격적인 공출이 시작되면서 조선인들의 주된 식량인 곡물소비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욱 열악해졌다. 일제는 식량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식량증산정책과 함께 소비통제정책을 실시하면서 1940년부터 식량배급제를 실시했다. 그런데 배급량은 식량문제가 악화되면서 더욱 감소했다.

조선인들의 주식은 쌀과 보리를 비롯해 만주에서 수입한 좁쌀, 수수 그밖에 피 등이었다. 식량사정이 악화되면서 여름이나 가을에는 겨울철 주식을 보충하기 위해 도토리나 식용약초를 비롯해 초근목피를 먹어야 했다. 총독부는 도토리나 각종 약초 등을 대용식으로 배급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채취하도록 독려한 후 이를 공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식량부족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고, 상당수 농민들에게 ‘영농을 하는 것보다 자유노동으로 전직해 배급을 받는 것이 득책’이라는 염농사상이 유포되면서 이농이 늘고 농촌경제는 파탄지경에 빠졌다. 식량소비량이 떨어진 가운데 차별적인 배급제 실시로 인해 대부분의 조선인은 아사 직전의 비참한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조선주택에 대한 총독부의 기본정책은 개인의 주택신축을 중지하고 허가하지 않는 것이었다. 총독부로서는 한 매의 판, 한 개의 못도 우선 군수생산에 할당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개축을 인정했지만 낡은 자재만 사용한다는 제약이 있어 주택을 개선하기조차 힘들었다. 주택부족은 도시의 토지가격을 폭등하게 하고 집세를 현저하게 상승시켰다. 또한 전시에 목재공사 등 목재수요가 증대했고 이를 충족하기 위해 총독부는 조선목재를 대대적으로 벌채했으며 조선민중이 사용하던 신탄 사용규제를 더욱 강화했다. 또한 총독부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연료를 절약해야 하므로 ‘저온생활’이 필요하다고 강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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