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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번역의 자리] ① 번역의 식민성과 탈식민성
[우리시대, 번역의 자리] ① 번역의 식민성과 탈식민성
  • 윤지관 덕성여대
  • 승인 2001.0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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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적 규범 내면화에 저항하는 번역의 정치학

우리 연구 일반, 특히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번역이 차지해왔고 또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거의 압도적이다. 크게 보면 우리에게 근대란 거대한 번역과정이라고 지칭될 수도 있다. 해방 이후 서구의 수용이라는 일반적인 사회적 과제가 학계에서도 무엇보다 영어권 편향의 연구를 정착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났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것은 2차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가 편성되는 가운데 특히 미국의 직간접적인 지배 아래서 국가를 이룩해나갈 수밖에 없었던 세력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그 결과 학문연구의 방법론에서부터 세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적인 시각과 방법론이 거의 보편화되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수용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것이 다름아닌 번역이다. 그 점에서 번역이라는 문제는, 현실적으로 항상 부딪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나아가서 우리 학문의 기원 자체에 닿아 있는 중요한 물음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번역 혹은 번역 현상에 대한 합당한 학문적인 관심은 주어지지 않았다. 번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때이다.
이와 같은 요구는 특히 근래 들어 강화되고 있는 지구화(globalization)의 추세 속에서 더욱 절박해지는 면이 있다. 지구화가 민족국가들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를 하나로 통합해내는 과정이라면, 여기서 각 민족어들 사이의 교섭과 충돌이 더욱 격렬하게 일어나게 되고 이것은 결국 번역이라는 현상이 한층 일상화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더구나 지구화가 언어의 권력관계에서 영어의 지배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만큼, 우리 학문에서 번역을 통한 서구 수용에서 생겨나는 제반 문제들은 더욱 심화되어 나타나게 마련이다.

번역가의 손끝은 권력쟁투의 지점

이같은 상황에서 번역 및 통역 대학원이 각 대학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그것이 모두 다름아닌 세계화에 대처하기 위한 인재양성을 기치로 내걸고 있음도 시사적이다. 근래 번역가와 학자들로 번역학회가 결성되기도 하고, 서구에서 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학문영역으로 자리잡은 번역학(Translation Studies)에 대한 학계의 관심도 감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이같은 현상 때문에 오히려, 번역의 본질이라든가 그 이념 혹은 방향에 대한 질문이 더욱 긴요해지는 시점이기도 한 것이다.


번역이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과정 혹은 옮겨진 결과물을 지칭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이 작업에는 복합적인 요소들과 층위들이 개입된다. 번역을 통해 두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만나고 충돌하고 교섭하는 과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원저자와 번역자가 이 번역과정에서 일정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되, 이들의 관계가 사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며 나아가서 정치적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즉 번역은 한 문장 혹은 텍스트들 간의 옮김이면서 동시에 두 언어체계 사이의 만남이기도 하며, 이같은 언어 사이의 만남은 각 언어들이 터잡고 있는 환경들 사이의 관계를 동반한다. 번역의 정치성은 여기서 발원하고 번역과정에는 권력관계가 필연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서구에서 근대적인 민족국가의 형성과정에 고전의 자국어로의 번역이라는 현상이 동반되었던 것도 그렇지만, 근대화를 서구의 침입 및 지배와 더불어 겪게된 식민지에서의 번역 문제는 더욱 착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번역은 피식민국에게 피할 수 없는 선택이자 기회이기도 하다. 즉 서구적인 의미의 근대성의 달성은 일차적으로 번역을 통하지 않을 수 없는데, 번역활동은 또한 서구적인 규범들을 내면화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번역이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옮김이면서, 여기에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근대성을 획득해나가는 동시에 서구적인 지배질서에 종속되지 않는 전망을 획득하는 일이 우리 사회의 지난하면서도 필수적인 과제라면, 번역을 바라봄에서도 이같은 중층적인 시선은 필요하다.


번역의 공간은 이질적이면서도 좀더 근대적인 형태의 문화들이 이입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제국주의적인 기제들과 결합된 문화가 우리의 삶 속에 침투하고 지배력을 행사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번역은 단순히 타자를 답습하는 것만도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 창조해내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룩해내는 과업이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압도적인 지배-피지배의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고 또 그 구조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탈식민의 과제가 부과되어 있는 우리 사회의 기획과 관련하여 번역을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번역이 정치성의 공간이라는 인식은 그것이 한편으로 기존질서에 대한 저항과 해체의 공간일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무엇을 어떻게 왜 번역하는가라는 물음에 기반하는 ‘번역의 정치학’에 대한 인식이 우리에게 긴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줄타기

권력관계가 번역에 투영된다면 일차적으로 그것은 중심부의 지배라는 현상이 번역에도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가령 미국의 경우 번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타국 특히 식민지를 겪은 나라들에 비해 현저하게 작다. 그 반면 피식민국들에게 번역은 피할 수 없는 요청이자 근대화의 계기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제국의 경우, 번역은 피식민지의 현실을 자기 문법에 따라 신비화하거나 변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쉽고 이같은 오리엔탈리즘은 지배이념을 일반화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반면 식민지에서 번역은 다수 대중을 향한 계몽이자 제국 질서에 대한 승복을 목표로 이루어지며 제국의 고전들은 알게모르게 자국의 것들에 비해 더욱 우월한 어떤 것으로 표상된다.


이같은 번역의 정치성을 인정할 때, 번역의 지향과 이념에 대한 모색은 특히 탈식민의 과제를 안고 있는 사회에서 중요한 질문이 된다. 번역이라는 현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이 좁은 의미의 민족주의적인 편향이라고 한다면, 반면 번역에 대한 아무런 자의식이 없거나 적극적인 수입상의 경우에는 주체성이 삭제된 서구추종의 사례가 될 것이다. 주체성에 대한 물음은 번역에서 본질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며, 의식있는 번역자라면 언제나 부딪치는 일이기도 하다. 상이한 두 언어간의 교섭을 경험함으로써 타자를 인식하고 이에 비추어 자기주체를 형성해내는 일은 번역행위 자체에 내재된 특성인 것이다.


실제의 번역과정에서 충실성(fidelity)의 이념이 핵심적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의 발동이라든가 제국 쪽의 왜곡도 문제이지만, 동시에 피식민국의 번역활동에서도 타자에 대한 경계와 배척이 의도적인 원문곡해로 드러날 가능성은 늘 있다. 충실성은 번역에서 얼마나 사심없는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물음이기도 하기 때문에 반드시 텍스트의 축자적인 옮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의 번역이론에서 충실성은 이미 시효상실된 것으로 배척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충실성이란 원전과 번역의 이분법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체의 대상이 된다. 탈구조주의적인 인식에 따르면 충실성은 언어의 불확정성과 의미의 유동이라는 전제와 어긋난다. 그러나 이같은 해체전략이 번역과 원전의 구별을 없애고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번역임을 폭로한다고 해도, 번역의 정치학에 끼어드는 지배-피지배의 현실관계에 대한 대응과 전망을 창출해 낼 수는 없다.

원문곡해, 번역의 정치에 미치지 못해

충실함의 이념은 실제 번역의 정확성과 질적 수준을 재는 기준이 되기도 하고, 더 깊게는 객관성에 대한 질문과도 맺어져 있다. 근대를 따라잡고 또 그것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서구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필요하며, 한편으로 이러한 인식은 진정으로 근대를 넘어서려는 탈근대의 과업에서도 필수적인 것이 된다. 여러 차원의 부정확한 번역들이 성행하고 이것을 제어할 만한 장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우리 현실에서, 충실한 번역에의 요구를 ‘해체’하는 데 몰두하는 것이 우리 나름의 근대수용과 그 극복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편집자주 : 지난해 ‘번역과 일본의 근대’가 번역되면서 국내의 번역담론이 불붙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논의마저 번역으로 촉발되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출간되는 학술서의 대다수가 번역서인 현실에서, ‘번역’이 제기하는 쟁점들은 더 이상 피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4회 연속으로 그 문제들을 점검하려 한다. 우리시대에 번역이 갖는 정치성이 그 첫 번째이다. 번역행위를 거쳐 서구를 만나고 근대를 체험했던 한·중·일 3국에서 번역의 의미를 살펴보고, 특히 문어와 구어와 분리 속에서 창조적 계승의 맥이 끊긴 국학번역과 근대한국어를 탄생시켰던 번역행위를 짚어본다. 식민과 탈식민이라는 모순된 두 단어의 교집합인 번역의 의미와 방향을 진단하고자 한다.


차례 ①번역의 식민성과 탈식민성 ②번역과 동아시아의 근대
③국학번역과 국어의 탄생 ④번역과 탈식민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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