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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 혹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감정’
‘도둑질’ 혹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감정’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5.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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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 소유를 사유하기, 세가지 표정

 

마르크스에 의해 “자본주의의 발전법칙에 둔감한 전근대적인 프티 부르주아”로 멸시받았던 조제프 프루동의 주저 ‘소유란 무엇인가’(아카넷 刊)가 ‘대우고전총서’의 아홉번째 책으로 번역돼 나왔다. 산업 부르주아 독점체제였던 7월왕정의 한복판(1840)에서 자본가의 소유 독점을 강렬하게 비판하면서 등장한 이 책은 “소유란 도둑질이다”라는 주장을 철학적으로, 경제학적으로 입증하려한 한 무산계급 사상가의 실존적 고뇌가 어린 출사표라고 할 수 있다.

프루동은 소유의 문제가 자본주의 사회의 으뜸가는 철학적 주제라고 생각했다.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식자공과 조선소의 사무직을 전전하며 작가적 저변을 넓혀간 삶의 이력이 말해주듯 가진 자에 대한 그의 증오는 대단했다. 이 책은 소유의 종말을 연역적으로 외친 프루동이 소유를 자연권의 차원에서 정당화하고 있는 당대 사상가들의 주장을 반박함으로써 결국 소유를 매장시키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보여준다.

돈과 토지에 대한 소유의 불평등을 유물론과 아니키즘의 연합공세로 몰아 부친 이 책은 큰 파장을 불러오긴 했지만 설득력을 얻진 못했다. 프루동이 사유제의 반대편인 공유제에 대해서도 인간기본권의 침해여지가 많다며 제3의 길의 필요성만 제기함으로써 대안제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처녀작인 이 책과 모순된 수미쌍응을 이룬 유고작 ‘소유의 이론’(1963)에서 소유가 나쁜 것이긴 하지만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 개인의 자율권이 보장될 수 있는 장치라며 옹호해 결국 초기 주장을 뒤엎었다.

프루동의 입장 전환은 소유에 대한 사유의 심화라는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소유에 대한 비판을 넘어,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과정으로 달려갔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들의 욕망을 무장해제한 사회주의는 국가권력의 소유권을 방임함으로써 재화의 재분배나 생산력의 차원에서 쓰디쓴 실패를 맛봤다. 이에 비해 현실논리로 돌아선 프루동의 소유론은 인간의 먹고사는 문제로 낮게 낮게 가라앉고 있어서 색다른 설득력을 갖는다. 이 책에서도 ‘7월왕정’을 좌지우지한 자본가들의 횡포에 대한 구체적인 불만들, 그리고 “사회적 본능을 구출하러 나선 이성의 자발적인 노력” 차원에서 전개되는 소유와 평등의 철학적 단상들은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소유라는 단어는 사물이나 재화의 배타적인 소속양태만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인간 감정의 차원에서 또 한번 뜨거운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불가리아 태생의 프랑스 기호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소설 ‘포세시옹, 소유라는 악마’(민음사 刊)에서 인간고통의 마술적인 근거지로 소유라는 감정을 포착한다. 저자는 “어머니가 아이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유아 상태로 붙잡아두고 싶어하는 무의식적인 성향”에서 소유의 파국적인 의미를, 母性의 더할 수 없는 고통을 읽어내고 있다. 주인공 글로리아는 청각장애를 겪는 아들 제리를 정상적인 삶의 표면에 데려가기 위해 세심한 애정을 기울인다. 하지만 그 애정은 ‘포세시옹’(소유)의 방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잘못 끼워진 단추였다. 이 때 포세시옹의 진실은 “상처받은 사람들이 갖게 되는 감정”이라는 데 있다. 저자는 이 소유라는 것을 한 상처받은 정신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쉴새없이 작동시키는 감정의 복합적인 기제로 묘사한다. 인지과학과 심리학, 정신분석학적 임상실험에 정통한 저자는 그 과정을 추리소설이라는 양식에 녹여서 심도 있게 추적한다.

이 소설에서 소유란, 초자연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정신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초자아이며 자아의 머리를 짓누르는 만성적인 편두통이다. 크리스테바의 전언은 물질적인 상태의 소유라는 것도 이런 정신적인 현상의 표현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해보게 한다. 나아가 소유라는 것의 뿌리깊음의 한 단면을 엿보는 기회도 제공한다.

제러미 리프킨 같은 사회비평가는 문명론적인 차원에서 소유를 다루고 있다. 속도가 좌우하는 변화의 시대에 물건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부의 척도가 아닐 뿐만 아니라,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 ‘소유의 종말’(민음사 刊)은 소유를 대체하는 단어로 ‘접속’(access)를 제시한다. 상품을 교환하는 데 바탕을 둔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험 영역에 접속하는 데 바탕을 둔 자본주의 체제로 변한 오늘날, 부자의 여부는 접속권에 따라 판가름된다는 주장이다.

리프킨은 소유라는 영역이 포괄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나 다양한 경험들마저도 상품으로 포장되고 교환되는 시장의 전면화를 알리는 데 무게중심을 둔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소유의 종말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은 실감이 오지 않는다. 프루동이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고, 크리스테바가 한 여인의 두개골을 열어서 보여준 것처럼, 인간들이 여전히 소유라는 방식에 길들여지고 있으며, 소유라는 감정으로 스스로를  고통의 길로 연마해나가기 때문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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