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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잣대
성희롱 잣대
  • 이영란 숙명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17.12.1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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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이영란 숙명여대 명예교수·법학

자고 깨어보니 어느 순간 갑자기 변해있는 것들이 있는가하면, 강산이 변해도 잘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변하지 않는 것들 중에 좀처럼 변화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도 있다. 우리 사회의 성희롱 작태가 바로 그것이다. 

1991년 뜨거웠던 여름의 일이니 벌써 사반세기도 더 지난 일이다. 미국에서 대법원 판사로 지명된 클래런스 토마스가 동료 여교수에게 성희롱한 사실이 밝혀져 온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었다. 법대 교수였던 어니다 힐이 과거 토마스가 자신에게 성희롱 했던 사실을 상원 청문회에서 증언한 것이다. 이성을 성적인 언행으로 괴롭힌다는 섹슈얼 허래스먼트(Sexual harassment)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도, 우리 사회에서 아주 오랫동안 만연돼 왔던 성희롱이 드디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 것도 아마 이 때쯤일 것이다.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흐른 오늘,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공공기관에서부터 직장 내 성폭행·성희롱을 척결하지 못하면 공공기관장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한 것을 보면 25년이 지나도록 성희롱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성희롱이란 간단히 말하면 장난성 성적 언행이다. 그러나 반드시 대향적 관계에서 상대가 있어야만 이루어지는 언행이어서, 희롱하는 자에 대한 비난 요소 외에 피해자의 감정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피해자의 감정요소를 기준으로 성희롱 여부가 결정되는 것처럼 보여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성희롱 판단 기준이 애매하다느니, 여성을 쳐다보기만 해도 재수 없으면 걸린다느니, 남자들만 억울하다느니 냉소적으로 왈가왈부한다. 심지어 과거에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대학 내 성희롱사건의 항소심 판사조차 판결문에서 “이성에 대한 호의적 몸짓과 악의적이 아닌 성적 접촉은 사회와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윤활유……”라고 했다. 피해자의 입장보다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악의적이 아닌 성적 언행은 생활의 윤활유라고 운운하면서 괜찮다는 식이다. 사회지도층 인사가 골프장에서 캐디의 특정 부위에 손가락질한 사건을 두고도, 여성이 너무 큰돈을 요구했다느니, 설마 그랬겠느냐고 반신반의하면서 본말이 전도된 생각들을 토로하고 있다. “성희롱이 무엇인지 정확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하지 말라는 것이냐”가 성희롱을 희롱하고 있는 남자들의 반문이다.

성희롱은 형법에 저촉되는 범죄는 아니기 때문에 성희롱의 행위 유형을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없으며, 어떠어떠한 것이 성희롱이라고 나열할 필요도 없다. 성폭력특별법에 넓은 의미로 성희롱이라고 볼 수 있는 경우가 포함돼 있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우리 형법은 강제성·폭력성을 수반한 성범죄, 미성년자에 대한 위계 위력을 사용한 성범죄 등과 같이 물리적으로 저항할 수 없는 경우의 성범죄만을 처벌하고 있을 뿐이다. 즉 저항할 수 있는 경우에는 자유로운 판단력을 가진 성인을 보호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성들 스스로가 타인의 성적 언행에 불쾌하다면 과감히 거부해야 한다.

다만 거부하고 싶어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경우의 대표적인 예가 ‘직장 내 성희롱’이다. 우리 법제에서는 직장 내 성희롱을 민사상 불법행위로 인정해 손해배상과 같은 민사적 책임을 지운다. 법원이 인정하고 있는 성희롱의 개념과 그 적용의 객관적 기준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한 성적 언행으로, 불쾌감과 굴욕감이 뚜렷하고 명백한 행위여야 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피해자에게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경우’이다. 대개의 성희롱자들은 직장 내 상하관계, 학교의 사제관계와 같이 피해자들이 거부하기 힘든, 만일 거부하면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지위를 이용해 성희롱을 한다. 50년 전이나 25년 전이나 요즘이나 크게 변하지 않아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성희롱 방지를 지시하는 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이다.

그러나 성희롱 없는 사회로 가는 길은 사실 멀지 않다. 정치변혁이나 자원고갈, 환경공해 같은 큰 문제도 아니다. 코끼리도 냉장고에 집어넣는다는 조교의 인권을 교수가 존중해주고, 사장이 비서의 인권을 존중해주고, 각자가 약자의 인권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성적언행으로 괴롭히거나 장난치지 않으면 된다. 어느 날 자고 깨어보니 성희롱 없는 세상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영란 숙명여대 명예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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