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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든 학생들
꽃을 든 학생들
  • 설유정 기자
  • 승인 2003.05.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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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이 걸어온 길

“인간의 정신적 인격을 가꾸고 키워주는 스승의 높고 거룩한 은혜를 기리어 받들며 청소년들이 평소에 소홀했던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불러 일으켜 따뜻한 애정과 깊은 신뢰로써 선생님과 학생의 올바른 인간관계를 회복함으로서 사제의 윤리를 바로잡고 참된 학품을 일으키며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을 교육하는 숭고한 사명을 담당한 선생님들의 노고를 바로 인식하고 존경하는 기풍을 길러 혼탁한 사회를 정화하는 윤리 운동에 도움이 되고자 스승의 날을 정한다.” (‘스승의 날 제정 취지문’,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 1964년 5월 16일)

스승의 날 역사는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충남 논산시 강경여고(현재는 강경고)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은 5월 8일 세계 적십자의 날을 맞아 병상에 있는 스승, 진동만 교사와 퇴직 교사들을 위문하며 이 날을 ‘은사의 날’로 정했다. 이후 학생들은 5월 8일 ‘은사의 날’ 마다 스승에게 꽃을 달아주고 기념행사를 갖는 전통을 만들었다.

1958년 강경여고에서 출발
이 사실이 충남지역에 퍼지면서 청소년적십자사 충남협의회는 1963년 9월 21일을 ‘은사의 날’로 정해 도내 모든 단원들에게 이에 동참하도록 했다. 이듬해인 1964년 전주에서 열린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에서는 ‘은사의 날’을 ‘스승의 날’로 고쳐 부르기로 하고 날짜도 5월 26일로 고친 뒤, 위의 ‘스승의 날’ 제정 취지문을 발표했다. 전국 규모의 첫 민간 스승의 날 행사가 열린 것이다. 이들이 주도한 ‘스승 찾아 뵙기’ 행사는 전국 5백43개교로 확대됐다.

날짜가 5월 15일로 확정된 것은 다시 이듬해 1965년, 부산에서 열린 제15차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에서였다. 이 협의회는 세종대왕 탄생일(1397년 5월 15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고 전국 초중고 학생회장에게 제2회 스승의 날 기념식을 갖도록 호소문을 보냈다. 아울러 대한적십자사에서는 윤석중 작, 김대현 곡의 ‘스승의 날’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개입을 시작한 것은 1973년부터다. 유신 시절 학생집회 불허 방침에 따른 ‘서정쇄신’으로 ‘스승의 날’ 행사가 폐지됐다. 그러나 1982년에 다시 정부가 스승의 날을 부활키로 결정, 5월 15일을 ‘정부 기념일’에서 ‘스승의 날’로 바꿔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강경여중에서는 지난 2000년, 높이 10m의 기념탑을 세우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비판의 목소리들

그러나 요즘에는 스승의 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선물을 주고 받는 관행에 ‘청탁성’이 짙다는 것. 이런 이유로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는 지난 1998년부터 스승의 날을 학기초인 5월에서 학년말인 2월로 옮기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대학가의 스승의 날은 더 썰렁하다. 김중섭 경상대 교수(사회학과)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박카스를 들고 찾아와 이야기를 청하던 제자가 있었는데, 요즘 학생들은 스승과 함께 있는 걸 불편하게 느낀다”라며 아쉬워했다. 그는 요즘 교수들이 “‘스승’이라는 전통적 위계관계에는 거부감을 느끼고, 그렇다고 제자와 학생이 남남처럼 지내는 것에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세대”라고 정의했다.

이왕주 부산대 교수(윤리교육과)는 “교수들이 데모를 막는 등 ‘관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것을 학생들이 본 1990년대부터 대학가의 분위기가 이렇게 냉소적으로 바뀐 게 아닐까 생각한다”라며 “요즘 스승의 날 분위기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데 심각성이 있다”고 못박았다. 대학가에 ‘존경’이란 개념이 아예 없지 않느냐는 반문이다.

안타까움만 있는 건 아니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꽃다발을 들고 교수 연구실 앞을 기웃거리는 졸업생에서부터, 풍선을 요란하게 매달려고 찾아오는 학생들이 적잖게 눈에 띈다는 사실에서, 이 땅의 스승들은 위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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