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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사 초기의 논쟁지형-'번역무용론’에서 '문화번역가론’까지
번역사 초기의 논쟁지형-'번역무용론’에서 '문화번역가론’까지
  • 이옥진 기자
  • 승인 2001.0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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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양주동, 유진오-김진변 논쟁

"번역은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다. 저울의 한쪽에 저자의 말을 얹고 한쪽에는 번역어를 올려놓는 일이다.” 20세기 프랑스 작가이자 번역가 발레리 라르보의 번역에 대한 정의이다. 이처럼 번역이 단순히 이 말에서 저 말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합의된지 오래.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는 기본이 수십년 전 이 땅에서 논쟁의 핵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한글 번역사는 짧으며, 자연히 번역의 방법론과 위상 등에 대한 합의는 빈약한 편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 학계가 맞고 있는 ‘번역의 황금시대’에 점검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일본의 경우, 18세기 초반에 네덜란드어를 익히고 난학을 활성화했다. 강재언 전 하나조노대 교수(한일사상사)는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가 여기서부터 갈라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경우, 번역은 두 문화를 직접 잇는 교량이 되지 못하고 중국어와 일본어라는 ‘연락소’를 통하는 중역의 시대를 거쳐간다. 17세기에 최초로 이입된 서구근대의 과학사상은 중국에서 수입한 漢譯된 문헌들이었다. 서구적 계몽을 이루려는 최초의 시도였던 1894년 갑오경장 시기에는 봉건타파와 근대성취를 외치던 계몽주의자들 역시 일역된 서적들을 대량으로 번역해냈던 것이다. 여기에 ‘번역무용론’까지 가세한다. 1920년대 김동인은 “여력이 있으면 몰라도 몇 배 우수한 일역이 있고, 또 모두가 중학생 이상의 사람이라면 일역을 능히 읽을 수 있는데, 구태여 그만 못한 우리말 번역에 힘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며 ‘번역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다. 입말과 글말의 분리에 일어사용까지 겹치면서 한국어의 정체성이 모호한 상태에서 초기의 번역사는 이토록 혼란 속에 방치되었던 것이다.

김병철 중앙대 명예교수(영문학)의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을유문화사 刊, 1975)에 따르면, 해방 이후 번역르네상스를 맞이하기 이전에 크게 두 차례의 번역논쟁이 있었다. 최초의 논쟁은 1920년대 문예지 ‘개벽’과 ‘금성’에 발표된 김억과 양주동 간의 공방이다. 김억은, 양주동이 시를 축자역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충실한 직역이 시번역의 지향점일 수 없다는 반론을 폈다. 김억의 주장은 번역된 시도 하나의 창작품이므로 오역의 유무를 따지기보다는 번역시의 우리말표현을 살피자는 것이었다. 이에 양주동은 “충실한 직역과 소위 창조적 무드로 한 오역” 가운데 선택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전자라면서 오히려 김억의 오역을 지적하며 이에 응대했다.

직역대 의역, 축자역대 창조적 오역이라는 초보적인 논의에 비해 1930년대 해외문학파와 비해외문학파 사이의 논쟁은 ‘번역론’이라 할만한 생산물을 만들어냈다. 논쟁의 촉발은 유진오 등이 제기한 ‘해외문학파 무능론’이었다. 유진오는 “그들이 지금까지 소개한 작품은 거의 90퍼센트가 해외문학에 문외한인 우리로서도 이미 십년도 전에 재독삼독한 것이며, 번역가들은 일어 중역이 아닌 직접역을 할만한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난에 가까운 의문을 제기했다. 소설가 최재서 역시 해외문학파의 번역이 고전문학에만 파묻혀 현실과 현대문학을 외면한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당시 대표적인 번역문학가였던 김진변의 반론은 번역이 요구하는 시대적 의미를 짚어내고 있다. 김진변은 그의 논문 ‘번역과 문화’에서 이른바 비해외문학파들이 문화의 영향력과 속성에 무지하다고 역공했다. 번역이란 개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세계와 우리 사이에 놓인 거리를 단축시키는 문화적 행위이자, 외국문화를 ‘조선적으로’ 소화하여 ‘조선적인’ 토양에서 발아시키는 재창조 작업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김진변은 모든 문필가들이 문화의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1950년대 해방과 전쟁 이후 문고판으로 세계문학전집이 쏟아지면서 김진변이 주장한 ‘문화의 번역가’로서의 역할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게 된다. 이후 간단없이 이어지는 오역논쟁 이외에는 이들의 논의를 넘어서는 번역논쟁이 부재한 상태로 우리는 제 2의 번역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쏟아지는 번역서 속에서 ‘쓸만한 번역서’를 좀처럼 찾기 힘들다는 세간의 평가 앞에 우리 시대의 ‘문필가’들이 다시 짊어져야 하는 의문부호는 무엇인가.

이옥진 기자 zo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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