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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계 블랙리스트
역사학계 블랙리스트
  • 최익현 편집국장
  • 승인 2017.11.07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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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1.
1988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임철우의 작품 「붉은 방」은 지금 읽어봐도 문제적인 작품이다. 고문기술자인 최달식은 어느날 새벽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고등학교 국어교사 오기섭을 닥달한다. 그는 주먹질, 발길질에 온갖 고문 끝에 이 가엾은 국어교사에게서 ‘나는 사회주의자’라는 자술서를 받아내고 만다. 최달식은 그런 자신을 두고 스스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파수꾼’이라 생각한다. 그는 증오를 품고 살아가는 자신의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는 ‘붉은 방’의 아늑함을 좋아한다. 최달식은 신의 은총이 방 안에 가득함을 느끼며 악인을 멸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한다.
작가는 이 작품 「붉은 방」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처절하게 망가져가는 모습을 비참하게 그려냈다. 폭력과 고문, 반이성이 날뛰는 지하의 ‘붉은 방’ 위로 아무 일 없는 듯 순조롭게 돌아가는 무심한 사회가 대비된다. 1980년대의 폭력적 사회상을 빼어나게 묘사했다는 평을 받은 이 작품으로부터 한국사회는 30년을 더 건너왔다. 주먹질, 발길질, 물고문과 같은 물질적 폭력의 행태가 날뛰던 그 시절로부터 우리 사회는 과연 얼마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곳으로 변화했을까.

2.
임철우의 작품 「붉은 방」이 이상문학상에 오르던 때로부터 25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만날 수 있다. 이제는 너무나 자주 인용되고 호명돼 익숙해져버린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저 유명한 구절이 바로 이 책에서 나온다.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인류사의 끔찍한 범죄 행위를 누가 저질렀는지 관심을 갖고 세기의 전범 재판 과정을 직접 취재했다. 아렌트는 이 무시무시한 악행을 충실히 이행한 자들이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일본의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장편소설 『해변의 카프카』(2002)에서 아렌트가 제기했던 ‘악의 평범성’을 녹여냈다. 하루키는 아이히만의 사례를 들며 “기계적으로 행하던 일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언급한다.

3.
이전 정부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연구자를 배제하고, 찬성하는 인사를 체계적으로 관리해왔다는 착잡한 뉴스가 들려왔다. 역사분야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특히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선언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역사분야 학술연구사업에서 배제했다는 건, 학술연구사업 전체를 근간부터 흔드는 일이어서 더욱 심각하다. 연구지원은 갖춰진 시스템 안에서 전문가들이 평가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배제해라, 지원해라 간섭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학술연구사업에 ‘정치논리’가 개입했고, 주무부처인 교육부와 연구재단은 이를 충실히 이행했다. 이전 정부의 교육부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추진단)은 공모 대상 연구분야에 지원한 30명의 연구자를 ‘역사교과서 국정화 찬반’에 따라 ‘◎’(적극 지원)와 ‘○’(지원), ‘빈칸’(지원 불가)으로 분류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머리는 뒀으되 생각하지 않았고, 이 행위가 학문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전 정부가 참담하게 붕괴된 가장 큰 이유는 ‘이성적 사고’의 부재에 있다. 생각 없이 위에서 시키면 그대로 따랐다. 이들이 저질렀던 과오와 실패, 오류로부터 새정부가, 특히 교육부와 연구재단이 무엇을 성찰하고 어떻게 변화할지 궁금하다.

 

최익현 편집국장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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