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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적 호흡을 잃어버린 ‘破格과 도전’의 작가정신
격정적 호흡을 잃어버린 ‘破格과 도전’의 작가정신
  • 이동석 미술평론가
  • 승인 2003.04.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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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 ‘김호득 개인전’을 보고

이동석 / 미술평론가·부산시립미술관 학예사

이번 개인전(대구 이현 갤러리, 4월 5일~5월 7일)의 화두가 ‘사이’로 명명된 것은 작품과 작가의 내면 모두에 걸쳐 어떤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에서 의미심장하다. 그 ‘사이’의 의미는 조화나 절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종의 모색이 일어나는 장이자 관계일 수 있다. 그것은 ‘비움과 채움’, ‘무거움과 가벼움’ 그리고 ‘빠름과 느림’, ‘그림과 지움’ 사이의 갈등과 마찰을 뜻한다.
김호득은 ‘파격과 도전’의 작가였다. 그가 준수해야 할 금기는 없었다. 화법과 품격을 철저하게 거부한 그의 그림은 모종의 불편함을 주면서도 보는 이의 속을 쓸어주는 후련함이 있었다. 작가에게 있어 전통은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분출되는 것이었고, 자연은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해체돼서 감지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작가는 자연의 총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진수를 포착했던 셈이다. 그래서 격정적 호흡으로 그려나간 바람과 폭포, 계곡과 산은 그 안에서 움직이는 힘과 기운으로 생동감이 넘쳐 났다.

2002년 개인전부터 회귀적 경향 노출
그 거칠고 박진감 있는 호흡이 잦아들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2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부터였다. 무심하고 잔잔하게 점을 찍어 채워나간 화면에서는 자연의 미세한 파장과 사색 끝에 배어 나오는 작가의 고른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이지만 화면에서 긴장이 사라짐으로써 작품이 중성화된 평면으로 환원됐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물론 이런 논의는 작품의 의도나 프로세스와는 무관한 인상적인 판단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은 평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어차피 오늘날의 미술 자체가 여러 미술 흐름과의 양식적·개념적 비교를 통해 판단되는 비평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김호득은 흑백으로 분할된 화면 위에 담박한 붓질을 가함으로써 기운의 회복을 시도하고 있다. 그 기운은 과거처럼 격정적으로 분출되는 것이 아니라 필획이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다가 과묵하게 표출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또 이 전시에서 나무토막과 종이죽에 먹을 먹인 입체작품도 선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이채롭다.
그렇다면 변화가 엿보이는 이번 전시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글머리에 쓴 것처럼, 이번 전시는 모색과 탐색의 과정이다. 그러나 그 변화가 몇 가지 점에서 마음에 걸린다. 가령 김호득은 먹의 침투성을 그 동안 배제해왔다. 먹이 바탕에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여백에서 튕겨 오르듯이 이질적으로 대비되면서 특유의 긴장을 만들어 왔다. 이번 전시의 작품에서 먹의 중첩과 스밈이 보이지만 그 변화의 개연성을 화면과 오브제가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대립의 조화와 극복, 변화인가 절충인가
또한 흑백으로 분할된 화면 위에 일획을 가하는 방식을 ‘대립의 조화와 극복’이라고 보기에는 왠지 절충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입체작품에서 보여주는 물질성에 대한 관심이 복원하고자 하는 기운의 생동감과 어떻게 조응하는 지도 궁금하다.      
일민미술관에서의 전시 이후에 나타난 일련의 변화에 아쉬움이 남는다면 그 과정이 자꾸 회귀적 경향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작품을 통해 마음을 비운다는 ‘修身’이라는 태도는 한국 미술에서 얼마나 많이 차용된 개념인가. ‘자연’이라는 모호한 수사 역시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개념적 복제를 낳았던가.
김호득 작품의 힘은 완강한 전통에 대한 격렬한 저항의 정신에 있었다. 또 자연의 정수를 가장 첨예하게 드러내겠다는 오만과 패기에 김호득 작품의 진정성이 있었다. 작가로서 김호득은 자의식에 가득 찬 ‘문제적 개인’의 전형이었다. 그간 작품활동을 통해 보여준 그 치열한 부정과 저항의 정신은 정체 상태의 한국화에 또 하나의 가능성과 활로를 보여줬다. 결국, ‘전통’은 온존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시시각각 여러 모습으로 수렴되는 것이며, ‘자연’ 역시 적응해야 될 어떤 원리가 아니라 자신을 가장 자신답게 표출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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