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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에서 세미나로 헤쳐모여… 외국이론 수입에 한계 노출
강좌에서 세미나로 헤쳐모여… 외국이론 수입에 한계 노출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3.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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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진단 : 대학 밖의 아카데미, 그들의 변화와 선택

철학아카데미의 한 강의실, 이곳에서는 ‘들뢰즈/가타리와 ‘되기’의 문제’라는 제목의 강의가 한창이다. 30명 정도 모인 강의실은 열기로 달아오른다. 대학의 고정된 커리큘럼이 채워주지 못하는 지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학생들과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대학 바깥의 각종 아카데미가 설립된 지 길게는 10여년, 짧게는 3여년이 흘렀다. 그간 대안적 학문공동체로 자리매김해 온 이들 아카데미에도 서서히 변화의 기미가 보이고 있다.

그동안 대학 밖의 각종 아카데미는 푸코와 들뢰즈 등의 현대 프랑스철학을 강의하는 곳으로 각인됐다. 건축과 미술, 동양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강좌가 개설됐지만, 프랑스 철학 부분에서 대부분의 ‘스타 강사’를 배출했다. 제도권 철학 교육의 빈자리를 메워왔던 것.

다양한 지적 유인책에도 관심 줄어

그런데 이번 봄학기는 조금 다르다. 문예아카데미는 ‘보르헤스의 지팡이를 따라’, ‘레비나스, 우리가 읽다’, ‘종교를 보는 눈’, ‘여백의 윤곽’, ‘주술과 마법 코드로 현대예술 읽기’ 등 실험적인 강좌를 대거 개설했다. 이른바 ‘스타강사’를 선택하는 대신 소장학자들을 전면으로 내세운 것이다. 개별 학자들이 남몰래 궁리하고 있던 것들을 풀어내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곳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강좌를 만들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철학아카데미 또한 ‘시민을 위한 철학 교실: 모둠마을’이라는 대중강좌와 ‘기의 문화를 찾아서’라는 기획강좌를 준비했다. 일반인들의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기와 도교 등 동양철학에 관한 강좌도 이제야 비로소 자리를 잡아간다는 내부 평가이다.

그런데 이번 봄학기는 조금 다르다. 문예아카데미는 ‘보르헤스의 지팡이를 따라’, ‘레비나스, 우리가 읽다’, ‘종교를 보는 눈’, ‘여백의 윤곽’, ‘주술과 마법 코드로 현대예술 읽기’ 등 실험적인 강좌를 대거 개설했다. 이른바 ‘스타강사’를 선택하는 대신 소장학자들을 전면으로 내세운 것이다. 개별 학자들이 남몰래 궁리하고 있던 것들을 풀어내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곳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강좌를 만들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철학아카데미 또한 ‘시민을 위한 철학 교실: 모둠마을’이라는 대중강좌와 ‘기의 문화를 찾아서’라는 기획강좌를 준비했다. 일반인들의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기와 도교 등 동양철학에 관한 강좌도 이제야 비로소 자리를 잡아간다는 내부 평가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의 성장은 잠시 주춤한 것 같다. ‘보르헤스의 지팡이를 따라’와 ‘기의 문화를 찾아서’ 등 몇몇 강좌는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상당수의 강좌는 그렇지 못했다. 시기상으로 ‘봄’이라는 핸디캡도 있었지만, 예상보다 적은 인원이 모인 것도 사실이었다.

문예아카데미에서는 3과목이 폐강했다. 최소인원만을 가지고 꾸려지는 강좌도 상당수이다. 철학아카데미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은 “작년 여름부터 철학아카데미의 성장세가 둔화됐다”라며 ‘경제 침체’를 원인으로 들었다. 이번 봄학기만으로 앞날을 점칠 수는 없지만, 이 상태로 계속 이어지면 아카데미 운영이 어려울 것 같다는 우려도 내비쳤다. 위기가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문예아카데미의 양진호 씨는 “문예아카데미가 처음 생겼을 때에 비하면 많이 침체됐지만, 위기를 느낄 정도는 아니다”라며 “비슷한 공간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에 인원이 분산된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대학 바깥에서 인문학을 고민하는 공간들이 늘어나고 계속 운영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위기를 논하기는 이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연구자 개성 반짝이는 강좌들


그런데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이하 수유연구실)는 상황이 정반대이다. 매학기 강좌와 세미나에 참여하는 인원이 점점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강좌라기보다는 ‘공동체’라고 하는 편이 옳다”라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 함께 모여 원하는 내용의 세미나를 꾸리고, 이 내용을 심화시켜 강좌로 개설하거나, 회원들이 원하는 내용에 대해 외부강사를 초청, 강의를 개설하기 때문에 매번 새로운 강좌가 유혹한다. 공부하고 싶은 주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세미나를 개설할 수 있기 때문에, 비슷하게 이어져오는 강좌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강점이다. 일방적으로 개설하고 폐강하는 ‘강좌’ 대신 두 사람만 모여도 개설할 수 있는 세미나는 개개인의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다. 지금도 25개 가량의 세미나가 운영 중이다. ‘제도로 보는 한국의 근대’, ‘계몽기 잡지 강독’, ‘고진 세미나’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다.

최근 수유연구실의 인기 강좌는 ‘8가지 테마로 보는 서양문화사’와 ‘동의보감을 읽는다’이다. 덜 딱딱해 보이기 때문일까, 학생에서 회사원, 주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다. 수유연구실 전체를 살펴볼 때 2년 전에는 대학원생들이 주로 참여했지만, 지금은 점차 학부생·일반인까지 고루 참석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강좌’ 중심의 학습에서 ‘세미나’ 중심의 학습으로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다는 진단도, 기존의 커리큘럼이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도 가능케 한다. “대표강좌로 떠올랐던 푸코, 라깡 등의 프랑스 현대철학의 열기를 이어나갈 만한 새로운 이론이 없다”는 김상봉 문예 아카데미 원장의 말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몇 년 동안 국내학계의 자생적인 이론도, 또 외국에서 수입된 사상도 없기에 밑천이 떨어져 간다는 것이다.

“푸코, 들뢰즈의 뒤를 이어, 지젝 등의 최신 이론가에 대한 강좌를 개설해야 하는데, 적당한 강사를 구할 수 없다”는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의 고민도 비슷한 지점에 서 있다. 지금까지 이들 아카데미는 대안적 학문공동체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생산적인 학문공동체를 구축해야하는 과제는 실행되지 못한 것 같다. 때 이른 걱정일지는 몰라도, 다시 생산적인 학문공간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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