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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학교,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민중운동
오산학교,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민중운동
  • 교수신문 기자
  • 승인 2003.03.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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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⑭

나는 백운대 정상에 오를 때마다 반드시 연상하는 한 인물이 있다. 바로 홍경래이다. 춘원의 소설이었는지 또는 월탄의 소설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홍경래가 소위 홍경래의 난을 일으킬 때 당시 한성을 떠나면서 백운대에 올랐다는 것이다. 지금도 백운대 꼭대기까지 오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당시에 백운대 정상에 올라 발밑에 조그맣게 보이는 궁궐을 바라보며 근 삼백오십년 전에 요절한 남이장군의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라는 유명한 노래를 큰 소리로 외쳐 부른 다음 게딱지만한 궁궐을 향해 오줌을 갈기고, 평안북도 가산 다복동에 들어가 홍경래의 난을 일으켰다는 고사가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함 선생님의 역사책을 보면 남이 장군의 위의 한시와 홍경래가 어려서 서당에서 지어 읊었다는 ‘秋風易水壯士奉 白日成陽天子頭’라는 한시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면서 소개되어 있다. 역사책의 전체 규모로 보아 이 정도의 지면 할애는 함석헌이라는 저자가 얼마나 이 두 인물을 흠모했는지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는 대목이다. ‘홍경래의 난’도 함 선생님의 역사책에서는 ‘홍경래의 혁명’으로 묘사되어 있다.

내부의 혁명은 교회와 학교 통한 정신 운동

<홍경래는 세상을 한 번 고쳐 만들어 보려다가 그만 실패하고 정주성 북장대에 오름으로 사라졌다. 역사를 읽어 여기에 이르면 저절로 한숨이 나옴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사실 뜻으로 생각해 보면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그는 민중을 깨우치지 못하고 말었기 때문이다.>라는 글로 시작된다 <재주라면 재주요 그 시대로는 면치 못할 일이라면 일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가 어디까지나 술책의 사람 꾀의 사람이요 사상가·신앙가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긴 세월을 두고 민중의 가슴 속에 정의와 자유의 정신을 깨워주려고 하지 않고 교묘한 꾀로 사람을 끌어 쉽게 결과를 얻어보려 했다. 그러나 민중을 깨우지 않고는 혁명은 아니되는 것이요, 깊은 사상, 높은 도덕의 신앙 아니고는 민중의 양심에 절대적인 동원령을 내릴 수 없다.>(함 선생님의 ‘남강·도상·고당’이라는 글, 전집 4권)

칼과 활로 하는 혁명이 껍데기의 혁명이라면 속의 혁명은 교회와 학교를 통해 하는 정신의 운동이다. 홍경래가 들다가 못 들고 만 민중혁명의 정말 큰불은 그가 간지 한 세기 후에 남강 이승훈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고당 조만식 선생에 의하여 일으켜졌다. 남강 선생은 홍경래가 하늘에 사무치는 한을 품고 죽던 그 정주성에 양반의 사냥개인 관군이 혁명에 나섰던 민중을 단으로 묶어 세우고 무찔러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던 그 광경이 아직도 생생한 가운데 자랐을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고 도산 선생은 그 홍경래가 났던 용강에서 났고 조만식 선생은 그가 성공했더라면 필시 새 나라를 거기서 건설했을 평양에서 자랐다. 그들은 홍경래처럼 칼과 활을 들지 않았고 따라서 그처럼 술책을 쓰고 선동을 일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일으킨 운동은 홍경래의 혁명으로는 비할 수 없는 맹렬한 형세로 퍼져나갔다. 홍경래 난이 있은 후 수십 년에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이리 같은 양반의 학정은 끝에 오르고 견디다 못해 하는 민중의 반항은 벌떼같이 일어나고 거기다 서양서 건너온 신문명의 사상은 사나운 서풍처럼 들이닥치고 세상은 물 끓듯 어지러워 갔다. 그러는 동안에 날마다 깨어가는 것은 사회의 바닥을 이루는 민중이었다. 거머리같이 피맛을 본 다음엔 떨어지지 않는 특권계급이 구차하게라도 그 권세를 지켜볼까 하고 정권과 민중을 일본에다 싸구려 흥정으로 팔아 넘겼고 그 때문에 이 민중의 자각운동이 한때 주춤거리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어떤 것을 가지고도 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무기와 술책이 없었던 이 혁명의 싹은 나날이 자라났으며 그래서 생겨난 것이 교회와 학교였다. 이와같은 현상은 전국적인 것이었지만 특히 서북지방에서 더 성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 평양의 대성학교, 정주의 오산학교였는데 대성은 합방이 되자 없어졌고 오산만은 길이 남았다.

이 세 분은 그때 민중의 가슴속에 굽이치기 시작한 커다란 운동을 대표하는 이들이요, 민중으로부터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던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이 세 분이 다 오산학교에 관계되어 있다. 남강 선생은 학교를 세운 이니 말할 것도 없고 도산 선생은 남강 선생이 당초에 학교를 세우도록 영향을 준 사람이며 고당 선생은 전후 두 번에 걸쳐 교장으로 오산학교를 이끈 분이시다. 그러니 오산은 특별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산은 단순히 글만을 가르치자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시작할 때 상투 튼 학생 여덟이 다였고 그 쓰고 있던 집은 옛날 서당 그대로였으나 그 속 정신은 전연 달랐다. 산 정신이 샘이 되어 이 썩어진 사회를 맑혀 보잔 것이 그 이상이었다.

남강·도산·고당 선생의 특별한 인연

오산학교를 이루는 것은 세 가지 요소로 되어있다. 그 첫째는 청산맹호 식의 민중정신이요 둘째는 자립자존의 민족정신이고 그 셋째가 참과 사랑의 기독교 정신이었다. 먼저 오산은 평안도의 오산이요 평민의 오산이다. 오산은 역시 평안도가 아니고는 아니됐을 것이다. 양반 냄새 모르는 평안도요 거기서도 군인의 아들로 태어난 남강이 그 상징이다. 남강 선생은 마흔살을 넘기까지는 한낱 실업가로 남이 돈 모으면 나도 돈 모아야지 하고 남이 벼슬하면 나도 벼슬해야지 하면서 지내다가 평양에서 청년 도산의 웅변을 듣고 마음 속에 크게 깨달아 머리 깎고 술 담배 끊고 곧 집으로 돌아와 학교를 세우고 사생활을 집어치우고 이때부터 나라 위한 공적 생애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남강의 마음을 이토록 일변하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민족주의 사상이었다. 도산이 말을 잘하여서가 아니라 그 말하는 내용, 사상이 진리였기 때문이다. 남강은 도산의 웅변을 듣고 자기 가슴속에 답답한 것이 확 뚫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감동한 것이었다. 답답한 것은 다른 것 아니라 봉건제도에 억눌린 민중의 혼이요 뚫린 것은 다른 것 아니고 민족주의 이론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장작이 있고 불씨가 있어도 불이 잘 붙으려면 바람이 잘 들어가야 한다. 남강에게 있어서 그 바람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모든 운동이 스스로 함에까지 가지 않으면 오래 갈 수 없는데 스스로 함은 신앙에 의하여 혼이 깨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남강 선생도 정말 그 정신이 철저해진 것은 감옥에 들어가 성경을 읽고 신앙을 얻은 다음에 참 남강의 모습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자유정신에 기반한 오산의 역사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대개 인물이 되는 데는 세 요소가 있다 할 수 있다. 하나는 타고난 바탕이요 그 다음은 그 바탕을 스스로 알아 발전시킴이요 또 그 다음은 시세다. 이 셋이 잘 맞아야 큰 인물이 된다. 남강이 타고난 바탕은 전이나 후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르나 이제 깊은 신앙적 자각이 생김에 따라 비로소 자기의 바탕을 잘 알고 시대의 의미를 잘 깨달아 그 할 것을 다하게 됐다. 그러므로 남강 인격의 고갱이는 기독교 신앙이고 따라서 남강의 인격을 또 한 그 고갱이로 삼는 오산정신의 알짬도 거기에 있다. 이점은 도산선생이나 조선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신앙 없이는 이 세 인물은 없고 오산도 없다.>

이렇게 오산을 말하는 함석헌은 오산이 선교사와 관계가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오산학교는 미션 학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오산학교의 특징으로 꼽고 있는 것이다. 미션 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도리어 자유로운 산 정신을 살릴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기독교라도 가톨릭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에게서 참 자유정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잘라 말하고 있다. “남강 도산 조선생이 만일 천주교 신자였더라면 그리하여 교황 명령을 지상명령으로 알았더라면 오늘 같은 민중운동의 지도자는 못되었을 것이다.”
<날도 시간도 잊을 수 없는 1930년 4월 8일 아침 9시, 지금도 그 자리가 눈에 선한 학교 운동장 복판에 학생들 모아놓고 타오르는 정기에 늙은 두 볼이 벌벌 떨면서 여느 때와 같이 말씀을 하시고는 그 끝맺는 마디가 “나는 너희가 그렇게 말 듣지 않는다면 다시는 말 아니 하겠다” 그러시고는 딱 단에서 내려와 버리셨다.>
그 다음 날 9일 새벽에 남강은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가 사모하는 함석헌을 있게 한 오산학교는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함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성경의 말씀으로 당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아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와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누가복음 15장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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