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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교과서’로 재탄생한 동양 고전
‘진보의 교과서’로 재탄생한 동양 고전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1.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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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대학』 (사계절 刊) 펴낸 김기현 연구원

고전은 두 가지 의미에서 만들어진다.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의 손에서 연마돼 강가의 돌처럼 투명해지는 측면이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특정한 목적에 의해 고전으로 고안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四書의 하나인 ‘大學’의 운명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밟아왔다. 원래 ‘禮記’의 한 편에 불과한 A4 한장 분량의 내용이었지만, 남송의 정이천과 북송 주자에 이르러 경전으로 추대된 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의미가 보태지거나 변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2003년 새해에, 한국의 젊은 고전연구가에 의해서 ‘대학’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에서 고전이 되고자 한다. 김기현 유교사상연구소 연구원이 ‘대학’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을 시도한 ‘대학’(사계절 刊)은 이 고대의 경전이 담고 있는 ‘동아시아적 진보’의 의미를 더듬기 때문이다.

“서구에서의 진보가 전통적으로 물질적인 부분, 인간의 외부에서 추구된 데 비해 동양에서의 진보는 내면의 발달을 의미했습니다. 인간이 동물적 의식 상태로부터 수양을 통해 우주 본연의 마음으로 고양돼 가는 과정이죠. ‘대학’에는 이런 동아시아적 진보관의 요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김기현씨가 읽어낸 동아시아적 진보는 인간의 내면에 있으며, 일일신 우일신하는 자연과의 조화, 변화하는 것(用)과 하지 않는 것(體)을 구분할 줄 아는 마음의 성장을 의미한다. 오리엔탈리즘의 대표적인 심상 중의 하나가 동양에 대한 정체성론인데, 이는 동아시아 지식인이 외면보다는 내면의 진보를 소중히 생각했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요, 겉으로 보기에는 순환, 반복하는 듯 보이는 자연이 그 내부에서 끊임없이 갱신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 소치라는 점에서 이 책은 서구적 진보관에 일침을 놓고 있다.

‘대학’은 유교의 당위적 실천 강령을 담은 개론서다. 이 책은 ‘대학’이 어떻게 해서 경전의 자리에 오르게 됐는지를, 핵심 개념이 다듬어져오는 과정을 통해 묘사해줌으로써 ‘대학’의 알맹이와 외관을 동시에 조명한다.
明明德, 新民, 止於至善의 3강령과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등 8조목이 담고 있는 핵심을 알 수 있고, 또한 중국의 정이천, 주자, 한국의 다산 정약용 등 지식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통해 역사·문화적 맥락을 되살려놓았다. 우리가 ‘대학’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김 연구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근 초강국이 된 중국은 내면의 자신감을 유교를 통해 되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유교의 기본이념이 현실에 가장 잘 구현된 것은 중국이 아니라 한국의 영정조 시대였죠. 우리는 이렇듯 유교문화의 뿌리가 깊은데 정작 유교가 뭔지 제대로 생각해본 경험이 별로 없잖아요. ‘차별은 부정하되 차등은 긍정한다’는 KTF의 광고문안이 바로 ‘대학’에 나오는 말인데 아무도 모르거든요. 단순히 뜻을 익히는 게 아니라 고전이 활용된 방식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서양의 철학은 지혜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출발점으로 삼지만, 동아시아의 학문은 사회 참여를 전제로 한다. 사회적으로 필요치 않은 내용은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중국에 불교가 수입되면서 개인의 해탈보다는 세상의 구원이 우월한 가치로 등장한 것도 유교의 영향이다. 근데 오늘날 고등교육의 상징인 대학교는 우주를 뜻하는 ‘University’의 번역어로만 의미가 있을 뿐, ‘대학’의 이념과 체제는 전혀 담고 있질 못하다. 대학개혁이 방향을 못잡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그 이념이 뚜렷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겠냐는 것이 김 연구원의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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