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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아주 오래된 기억
낡고 아주 오래된 기억
  • 김용민 (연세대·독문학)
  • 승인 2003.01.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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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김용민 / 연세대·독문학

오랜만에 학교를 찾은 졸업생들은 한결같이 학교가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말을 한다. 학교를 떠난 지 불과 몇 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새 건물이 들어서서 교정의 모습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거의 모든 대학이 지난 30년 간 엄청난 속도로 양적 팽창을 이뤄 그야말로 눈부신 변모를 경험했다. 지금도 새로운 건물을 짓느라 교정에는 덤프트럭이 분주하게 오가고 여기저기 고층 크레인이 서있다. 대학의 이러한 눈부신 발전은 오로지 경제발전과 성장만을 목표로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나라 산업화 과정과 참으로 닮았다. 발전의 대가로 우리 사회가 물질 만능주의, 성장 제일주의 그리고 더 나아가서 천민 자본주의의 정신을 얻게 된 것처럼 대학 역시 본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양적 발전에 매진하는 대학의 모습은 문어발식 팽창을 꾀하는 재벌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돈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는 기업의 행태나 사회에서 알아주는 전공에 학생들이 몰리고 기초학문은 찬밥 신세가 되는 대학의 현실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 이런 형편이니 대학 캠퍼스가 온통 공사판이 돼 자고 일어나면 새 건물이 우뚝우뚝 솟는 일이 벌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조금이라도 낡고 오래된 건물이라면 여지없이 부수고 높고 크고 화려한 새건물을 지어 흐뭇해하는 대학에서 전통과 역사를 찾는다는 일은 사치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낡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지혜를 우리는 언제 잊어버린 것일까. 6백년 간을 간직해온 한양의 모습이 지난 50년 간의 발전으로 왕들이 살았던 공간만 덩그랗게 몇 개 남고 온통 전통과는 거리가 먼 잡동사니 건물들로 채워져 버렸다. 이제는 불과 1백년 전의 건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공간이 사라지면 그와 함께 기억도 사라진다. 우리가 과거를 자꾸 잊어버리고, 과거를 묻지 말자고 외치는 것이 이러한 공간의 사라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옛 것이 남아있지 않으니 언제나 자신이 출발하는 선이 시작점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옛 것을 부정하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전통처럼 돼버렸다. 대학에서도 말로는 역사와 전통을 내세우지만 실상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와는 전혀 반대이다. 오래된 것을 부수고 크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새것 콤플렉스가 대학에도 만연돼 있다.

그런데 왜 대학마저 이렇듯 새것 콤플렉스에 물들어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 우리는 발전과 변화와 크고 좋은 것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전통과 역사를 팽개치게 된 것일까. 적어도 대학에서는 삐걱이는 나무계단과 곰팡이 냄새나는 강의실, 어두컴컴하지만 책 향기 가득한 도서관이 남아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선배들이 머물며 연구하고 강의하던 건물이 잘 보존돼 기억의 공간인 동시에 오늘의 후학들이 사용하는 현재의 공간인 곳이 대학이어야 하지 않은가. 모든 것이 변해도 여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곳을 대학은 보듬고 있어야 한다. 모두가 진보와 발전을 추구할 때 대학은 뒤돌아보며 천천히 가야 한다.

지난 10여 년 간 생태문학을 공부하면서 도달한 인식은 인류의 공생을 위해서는 이제 우리의 사고와 생활방식 그리고 사회구조 전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 높이, 더 빠르게, 더 크게!”라는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작고 낡은 것이 아름답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칼 아메리가 포이에르바하의 유명한 테제를 뒤집어서 “지금까지 유물론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매진해 왔다. 이제 문제는 세계를 보존하는 일이다”라고 한 말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글을 마치려니 요즘 연세대의 현안이 된 연신원 철거문제가 떠오른다. 참 아름답고 유서 깊은 자그만 석조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으리으리한 콘크리트 건물을 앉힌다고 한다. 학내 구성원 다수가 반대하는데도 곧 철거를 시작할 모양이다. 이를 어떻게든 막으려고 교수들이 천막 농성에 들어간다고 한다. 아마도 대학의 공간과 전통 그리고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교수들이 나선 최초의 농성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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