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더러 원로라고? 하기는 정년퇴임 했으니 원로임에 틀림없지만 퇴임 1년도 안 됐으니 ‘새내기’ 원로다. 그런데 그 짧은 세월이 아득히 느껴지니 웬 일인가. 시간적으로는 열 달이지만 심정적으로는 한 10년 된 것 같다. 어쩌다 학교 근처를 지나다가 옛 동료나 학생들이 조금도 변함 없는 것을 보고는 “이 사람들 세월 가는 줄도 모르네”하는 주객전도된 생각을 하기도 한다. 1년도 못 되는 사이에 급속도로 늙어 진짜 원로가 된 모양이다.
작년 2월 25일 나는 40년 교수 생활을 마감하는 퇴임식에서 “자기가 그만두면 하던 일이 완전히 결단날 판이니 계속 관계를 해야겠다는 것은 아주 그릇된 생각이외다. 세상에 ‘불가결한indispensable’한 사람은 없습지요” 했다. 나는 16년 간 붙잡고 있던 일(국어사전 편찬)을 그 날로 놓고 나왔는데, 대학이라는 데는 언제나 뒤이을 사람들이 줄서는 법이고 만일 없다면 그 일은 더 필요하지 않다는 뜻일 수 있으며 얼마쯤 지나서 일을 계속할 사람들이 다시 긴 줄을 설 수도 있다. 그런 게 대학의 풍속이다.
학생은 보통 4년, 더 공부하려는 사람은 6년 내지 10여 년을 신물나도록 시험치고 숙제하고 논문 작성하며 보내는데 나는 40년 동안 강의하고 문제내고 채점하고 논문 쓰고 책 내는 짓을 ‘신물’이 나기 직전 적절한 시기에 그만 둔 것이다. 미국 대학처럼 정년이 없다면 신물 아니라 진물이 뚝뚝 흐를 때까지 계속해야 할 터이니 크나큰 고역이겠다.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없는 고문이겠고.
교수들은 마지막 2∼3 년 동안에는 평생 몸에 밴 그 노릇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연습을 하는 게 좋다. 어차피 떠나야 할 터수이니 속담처럼 “정을 떼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그 잦은 회의에 더러 빠지기도 하고 출석하더라도 별 말 없이 앉아 있기도 하고 신임교수 채용문제로 후배 교수들이 대접전을 벌일 때 끼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그런 문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다가 쓰라린 상처를 주고 입고 떨어져 나오는 이가 적지 않아 하는 말이다.
연구실 책 중에서 집에 가져갈 것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날라오는 것이 은근히 정 떼는 법이다. 그런 뒤 학생들에게 맘대로 골라가라고 해도 좋다. 어느 날 갑자기 여봐란 듯이 이삿짐 센터의 차를 불러 한꺼번에 내가는 것은 정 단절 과시행위다. 내 친구는 몇 달이나 좁은 아파트에 갖다둘 책을 고르다가 포기하고 모든 책을 연구소에다 가져가라고 했다. 또 한 친구는 공공도서관에 가져가라고 했더니 그렇게 고마워할 수가 없더란다. 도서관에서는 쓸 만한 책만 고르고 나머지는 버리고 간다. 대체로 졸업논문, 학술논총, 화갑기념 논문집, 호화판 대학 선전책자 따위는 파지 더미에 버려진다.
서랍 정리는 시간이 꽤 들지만 흥미롭다. 갱지에 찍은 ‘도서반납 독촉장’이 어떻게 지금까지 보관돼 있었는지 놀란다. 옛 학생이 보냈던 편지, 빛 바랜 사진, 연하장 따위가 오래 묵은 서류 사이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그 중 소중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따로 모아놓는다. 나는 1960년 사태 때 농성교수들의 성명서들을 발견하고 기록보존소에 보냈다.
이렇게 슬금슬금 정을 떼고 떠나면 퇴임교수는 어느새 까마득한 후배를 멀찍이 바라보는 원로가 된다. 원로는 그런 대로 편하다. 때로는 바쁘기까지 하다. 원로원에 오심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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