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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제14회> "최장집의 한국민주주의론"
[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제14회> "최장집의 한국민주주의론"
  • 김호기 연세대
  • 승인 2003.0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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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유효한 실현가능한 민주주의 모델

과거의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랐다.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정권 민주화가 이뤄졌을 때, 사람들은 모두들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2002년 11월, 대통령 선거를 한달 앞둔 우리의 정치현실엔 여전히 그 옛날의 악취가 진동하고 있다. 과연 이 나라는 민주화된 나라라 할 수 있는가.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는 권력형 비리와 언론의 전횡, 벗어날 수 없는 중앙집중화 구조로 인해 질적으로 더 나빠졌다는 일부의 시각도 있다. 민주주의가 정치의 체제이기보다 ‘사회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토크빌의 말을 수용한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잠시 늦춰둔 정치성과 운동성을 회복해 새로운 도약을 모색해야 할 시기를 맞은 것 같다. 민주주의가 쟁취의 대상이었을 때부터, 폭넓은 이해와 실천의 대상이 된 지금까지 20여년 동안 최장집 교수의 한국민주주의론은 현실과 역사와의 연계 속에서 현사회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왔다. 민주주의 선진국들의 이론적 아이디어를 풍부하게 활용하면서 해방공간 이후 한국사의 윤곽과 세목에 대한 가장 선명도 높은 스케치를 보여준 그는 후배 학자들에게도 끊임없는 이론적 자극을 안겨줬다.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시들어 가는 지금, 분석적 이성과 역사적 이성으로 무장한 최 교수의 이론과의 대화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완성되지 않는 한 언제나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편집자주]

여전히 유효한 실현가능한 민주주의 모델

김호기 / 연세대·사회학

 
지난 50여 년간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그것은 크게 건국 시대(1945~1960), 산업화 시대(1961~1987), 민주화 시대(1987~현재)의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해방공간과 이승만 시대, 박정희 시대, 김영삼과 김대중의 兩金 시대로 구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코 짧지만은 않은 이 시기에 우리사회는 비로소 서구와 유사한 모더니티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진입했으며, 이와 동시에 우리의 독자적인 모더니티의 길을 걸어 왔다.
한국 현대사의 거시적 흐름에 대해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치밀한 정치학적 분석을 시도한 사회과학자로 나는 최장집 교수를 꼽고 싶다. 지난 20년 동안 최 교수가 진행해 온 일련의 학문적 연구는 바로 건국, 산업화, 민주화로 이어지는 역사적 도정 속에서의 한국 민주주의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치열한 탐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의례적인 찬사가 아니라 적어도 내가 보기에 최 교수는 분명 한국 민주주의의 사회과학적 분석 수준을 한 단계 이끌어 올린 정치학자임에 틀림없다.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한 민주주의 모색
최 교수가 우리 사회과학계에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1988)를 통해서였다. 박사학위논문이기도 한 이 책에서 최 교수는 국가조합주의의 이론틀을 활용해 한국 노동운동을 경험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당시 젊은 연구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의 정치학적 관심은 노동문제를 넘어서 현대 한국의 민주주의에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 기원으로 해방공간의 중요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사회과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후 그가 ‘비교 역사구조적 접근’에 기반해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변동에 대한 일련의 주목할 만한 저작을 발표해 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최 교수의 연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가 이론적 자원에 대한 탐색이라면, 두 번째는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분석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실천 프로그램에 대한 모색이다. 이제까지 발표된 최 교수의 주요 저작인 ‘한국 현대 정치의 구조와 변화’(1989),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1993),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1996)은 바로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대한 탐색이며, 김대중 정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발표한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세 번째의 핵심을 이룬다. 그리고 최근 발표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에서는 이 세 부분을 총괄하면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최 교수의 이론틀은 한마디로 ‘비교 역사구조적 접근’이다. 거시적인 역사구조적 조건과 변동을 중시하되, 그것을 비교정치학적 시각에서 조명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해명하려는 것이 최 교수의 일관된 연구전략이다. 그러기에 최 교수는 비교 역사구조적 접근을 강조하는 그람시, 무어, 슈미터의 저작들을 주요 이론적 자원으로 활용해 왔는데, 그람시로부터는 국가·헤게모니·시민사회에 대한 역사주의적 통찰을, 무어로부터는 비교 역사구조적 접근의 유용성을, 슈미터로부터는 자본과 노동의 역사적 타협을 중시하는 민주적 조합주의론의 가능성을 이끌어 왔다.
비교 역사구조적 접근으로부터 이론적 통찰을 빌려 왔다고 해서 최 교수가 행위론적 접근을 과소평가한 것은 아니다. 최 교수는 오도넬과 슈미터, 쉐보르스키의 민주주의 이행과 공고화 이론으로부터도 주요한 착상을 빌려왔다. 이 가운데 특히 시장과 민주주의의 친화가능성에 대한 쉐보르스키의 이론은 민주적 시장경제론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 이론에 대한 최 교수의 탐색이 갖는 장점은 서구 이론과 우리 현실 사이의 긴장을 일찍부터 고민해 왔다는 데 있다. 1980년대 후반 사회구성체 논쟁이 맹위를 떨쳤을 때에도 최 교수는 이론의 선택에서 이념적 지향보다 현실적합성을 중시했으며, 사실분석과 가치판단의 변증적 결합을 모색했다. 민주주의가 서구적인 제도인 한 서구의 눈으로 한국 정치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사실 불가피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인식의 자아준거점을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서 찾음으로써 한국사회에 걸맞은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를 모색해 온 것이 최 교수 한국민주주의론의 요체이다.

국가·시장·시민사회의 생산적 균형 강조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최 교수의 연구가 갖는 커다란 매력은 그 동학을 지난 50여 년간의 자본주의 산업화 속에 위치시켜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산업화 과정을 파악하는 최 교수의 역사적 퍼스펙티브는 이른바 변형주의, 수동혁명의 의미를 내포하는 ‘보수적 근대화’이다. 즉 한국의 산업화는 근대 국가기구의 형성, 토지개혁, 수출지향적 산업화에서 볼 수 있듯이 강력한 국가의 주도 아래 시장이 창출되고 시장사회가 통제되어 온, 위로부터의 근대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과정은 냉전반공주의 아래에서 진행돼 왔다는 점에서 그 보수적인 성격이 유독 두드러진 것이기도 했다.
산업화의 이런 역사구조적 조건 아래에서 진행된 것인 만큼 최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한다. 이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계기로 열려진 정치 공간 속에서 진행된 민주주의 이행과 공고화에 대한 최 교수의 분석에서 잘 나타난다. 흥미로운 것은 두 개의 민간정부에 대해 최 교수가 유사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김영삼 정부의 민주화에 대해 최 교수는 공고화를 성취하지 못한 이행에 머물러 있다고 분석한다. 구체적으로 그는 김영삼 정부가 군부통치를 종식시켰음에도 정치개혁입법과 금융실명제 실시 등 초기 개혁 드라이브가 좌절됨으로써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최 교수는 그 좌절의 원인을 여전히 강력한 보수세력과 보수적 정치사회에서 찾았으며, 이런 조건하에서 자본, 노동, 남북관계 등의 대다수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최 교수의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이런 맥락에서 제기됐다.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이룰 수 있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해서 국가·시장·시민사회가 생산적 균형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 이 패러다임의 기본 골격이다.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한편으로 개발 시대의 발전국가론을 넘어서고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시장만능주의론을 넘어서려는 정치적 기획이다. 시장의 원리를 존중하되 그 파괴적 측면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려는 이 패러다임에는 우리사회에서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를 모색하려는 최 교수의 고뇌와 성찰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런 김대중 정부의 개혁도 결국 좌절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최 교수의 진단이다. 최 교수에 따르면, 지난 15년간 한국 민주화는 ‘보수적 민주화’로 규정될 수 있으며, 이 보수적 민주화가 갖는 특징은 ‘조숙한 민주주의’ 하에서 형성된 보수독점적 정당체제가 민주화 과정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재생산돼 왔다는 데 있다. 이 보수적 민주화는 한국 정치사회가 갖는 역사구조적 특성에서 그 기원을 갖는 것이지만, 또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세력의 무능력에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갈등을 사회화하고 제도를 개혁하며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취약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전통을 활성화하는 것, 바로 이것이 최 교수가 제시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대안이다.
최 교수의 민주주의론이 우리 사회과학계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의 특수성과 보편성에 대한 연구에서 최 교수의 저작은 언제나 중요한 출발점을 이뤄 왔다. 조숙한 민주주의, 민주적 시장경제론, 보수적 민주화 등에 대한 최 교수의 분석과 대안은 현실적합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정책적 함의를 지닌다. 특히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발표 당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음에도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를 포괄하는 실현가능한 민주주의 모델로 여전히 유효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최 교수의 민주주의론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남긴 과제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분석은 더욱 정교화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의 발전이란 축적체제, 계급구조, 국가, 시민사회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진행되는 과정이다. 최 교수의 연구가 분명 정치 중심적 분석을 넘어서고 있지만, 한국 민주주의가 어떻게 입체적으로 진행돼 왔는가에 대한 설명에는 다소 취약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중심적 분석은 넘어섰지만 입체성 부족
둘째, 최 교수가 제시한 민주적 시장경제론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민주적 시장경제론이 적어도 중도적 또는 비판적 사회과학자들에게는 우리사회의 최소공약수적 대안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국가·시장·시민사회의 관계는 현재 진행되는 세계화와 정보화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시험대 위에 오르고 있다. 민주적 시장경제론이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를 모색한다 하더라도 점증하는 세계 현실의 규정력은 그 실현가능성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과제들에도 불구하고 최 교수의 민주주의론이 동시대 사회과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언젠가 나는 다른 글에서 최 교수를 한국의(대통령이 아니라 사회과학자로서의)카르도소라 생각해 왔다고 말한 바 있다. 사회과학자로서의 카르도소는 라틴 아메리카 지식인의 실존적 정체성과 서구적 지식인의 과학적 정체성을 조화시킨 인물이다. 서구의 눈을 빌려 오되, 한국의 현대사를 이끌어 온 흐름을 꿰뚫어 보고 현실가능한 정치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 이것이 최 교수 민주주의론의 핵심이다. 단언컨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최 교수의 학문적 磁場 안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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