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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세상이 다원화 됐다?
[學而思] 세상이 다원화 됐다?
  • 진형준 홍익대
  • 승인 2003.01.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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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형준/홍익대·불문과

얼마 전에 수시 입학 구술시험을 치렀다. 여러 문제 중에 시대의 변화에 따른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묻는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예전에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떠올리던 지도자 상이 오늘날은 왜 친화력이나 창의성을 갖춘 인물상으로 변화하게 됐는지를 묻는 문제였을 것이다.

그 문항을 택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거의 이구동성으로 시대가 다원화됐고 다양화됐다는 것을 우선적인 이유로 들었다. 하나의 집단을 일사불란하게 끌고 갈 수 있는 강력한 힘보다는 여러 생각들을 포용할 줄 알고 빠른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줄 아는 인물이 새로운 지도자로서 적당하다는 생각들을 대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은 일반인의 생각과 다름없을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다원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세계는 다원화됐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으며 어떤 글에서도 쉽게 눈에 띄고 다원적 인식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말이 되었다. 하지만 그 표현의 범람 현상을 보고 있는 내 심사는 그리 편치 못하다.

우리는 다원주의에 반대되는 용어를 일원론 혹은 일원주의로 대개 알고 있다. 다원주의가 기본적으로 일원론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이다. 다원주의의 기본 정신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화해를 전제로 한다. 가장 다원적인 정신은 가장 대립돼 보이는 것들끼리도 화해를 모색하는 정신이다. 진리와 善 정도의 이질적인 가치가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는 것, 아니 차라리 그것들이 화해하는 것이 바로 다원적 인식이다.

가장 이질적인 것들 간에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는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현상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이 겉모양만 다를 뿐 실은 그 뿌리가 같다는 생각에 의해 가능해진다. 일원론은 바로 다양한 현상들을 낳게 한 근본 뿌리와 동인은 같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그 뿌리가 같은 이상 나름대로 알록달록하게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낳는다. ‘같은 것이 없으면 다른 것이 없고 다른 것이 없으면 같은 것도 없다’는 것, 그것이 다원주의와 일원론을 맺어주는 기본 원리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원주의의 반대말이 이원주의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원론은 세계를 낳게 한 근원 자체를 나누는 인식이다. 이원론적 인식에 의하면 선의 뿌리와 악의 뿌리는 다르다. 그것들은 뿌리가 다르기에 절대로 화해 공존할 수 없다. 흔히 생각하듯 일원론에서 이원론으로 거기서 다시 다원주의로 생각의 방향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다. 이원론은 다원주의를 부정한다. 이질적인 것들 간의 관련성을 부정한다.

현대가 다원화됐다는 것은 따라서 현상들이 다양화되고 그 변화의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분화된 것들 간의 유기적 관련성을 중시하는 인식이 점차 자리를 잡게 됐다는 것을 뜻한다. 다원적 인식은 나와 다른 남의 존재를 인정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서 같은 것을 보고 같은 데서 다른 것을 보는 인식이며 그로 인해 언제나 더 큰 전체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식이다.

이쯤 오니까 수험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왜 속이 편치 않았는지 알겠다. 그러한 관계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다원성에 대한 이해는 오히려 우리 인식의 파편화를 심화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인식의 파편화에 의한 다양성은 우리를 기계의 부품 같은 것으로 만들지만 관계의 성찰에 의한 다원주의는 우리 스스로를 전체를 품은 부분으로 만들어 준다.

하나만 더 덧붙이자. 중요한 것은 세상 변화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의 변화다. 그것은 과학의 새로운 이론이 나왔다고 세상이 바뀐 것은 아닌 것과 같다. 그래서 이렇게 바쁘고 현란한 세상일수록 나와 나를 포함하고 있는 사회와 우주에 대한 차분한 성찰이 더 필요할 지도 모른다. 세상이 현란해지고 복잡해 보일수록 그것들을 맺어줄 직물 같은 것을 찾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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