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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사건이 보여준 ‘딜레마’…대중은 왜 혁명에서 멀어져 갔을까?
세기의 사건이 보여준 ‘딜레마’…대중은 왜 혁명에서 멀어져 갔을까?
  • 류한수 상명대·역사콘텐츠학과
  • 승인 2017.10.16 15: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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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다시 생각한다
해방을 꿈꾸는 조선인들과 혁명러시아의 밀월관계는 1920년 7월 19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찍힌사진에 포착돼 있다. 코민테른 2차대회에 펄럭이는 태극기. 사진출처= D. King의저서 『The Commissar Vanishes (New York: 1997)』78쪽.
▲ 해방을 꿈꾸는 조선인들과 혁명러시아의 밀월관계는 1920년 7월 19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찍힌사진에 포착돼 있다. 코민테른 2차대회에 펄럭이는 태극기. 사진출처= D. King의저서 『The Commissar Vanishes (New York: 1997)』78쪽.

올해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지 1세기가 되는 해다. 300년 넘게 러시아를 다스리다가 근대화와 제1차 세계대전의 압박을 못 이기고 하릴없이 무너진 로마노프 황조에 뒤이어 들어선 러시아 임시정부가 세계혁명의 전위를 자처하며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려는 볼셰비키와 맞서던 때가 딱 100년 전 이맘때였다.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은 노동자와 병사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1917년 늦가을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얻었다. 이 혁명은 세계를 뒤흔들었으며, 그 여파는 20세기 내내 지속됐다. 러시아 혁명은 오늘날 쓰이는 革命이라는 용어의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 유럽 점성술사의 맥락화

天命을 바꾼다는 뜻으로『주역』에 나오는 혁명이라는 표현이 동아시아 세계에서 가리키는 바는 하늘의 뜻에 따라 폭군을 몰아내고 백성을 구제하는 행위였다. 서양에서도 혁명이라는 낱말은 하늘과 연관돼 있었다. 빙빙 돈다는 뜻의 라틴어 동사 레볼베레(REVOLVERE)에서 비롯된 명사인 혁명(revolution)은,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에 펴낸『천구(天球)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라는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워낙은 천문학 용어였다. 행성의 운행을 가리키던 이 용어를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격변을 뜻하는 낱말로 쓰기 시작한 이들은 16세기 유럽의 점성술사였다.

별의 운행을 연구하면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성술사는 혁명이라는 낱말에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천체의 힘이 인간 세계에 작용해 난데없이 일어나는 전환적 대사건이라는 뜻을 보탰다. 이 맥락에서 제임스 2세가 의회의 신뢰를 잃고 쫓겨나고 새 왕이 옹립된 1688년 영국의 정치 격변에 사상 최초로 혁명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에서 한 세기가 지난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부터는 혁명이 정치 영역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권력 이동이라는 수준을 넘어 사회의 기틀과 얼개가 바뀌는 대격변이라는 뜻으로 확대되었다.

자유와 평등을 인류 보편의 가치로 내세운 프랑스 혁명은 근대를 열어젖히며 유럽 전체를 뒤흔들었다. 체제에 편입된 부르주아지의‘배신’탓에 완성되지 못한 프랑스 혁명의 가치를 마저 이뤄내겠다는 유럽 사회주의의 포부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집단이 러시아에 있었고, 그 한 갈래가 볼셰비키였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세기 전환기에 고통스러운 근대화 과정을 겪던 러시아에서 전제 체제의 타파를 외치는 정치 세력에는 여러 갈래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언뜻 보면 가장 미약했던 볼셰비키가 1917년 혁명에서 권력을 얻은 뒤 새로운 체제를 세워 생존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과 결말을 살펴볼 시점이 됐다.

빈부 격차가 극심한 탓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생각이 통념이지만, 사정은 단순하지 않다. 빈부 차가 심하더라도 저개발국가에서는 대중이 무기력해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발달한 공업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리라는 마르크스의 예견과 어긋나게 농업국가인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는 통념도 있다. 이 통념은 세기 전환기의 러시아가 요동치며 변화하는 세계 제5위의 공업국가였다는 사실에 눈을 감는 단견이다. 러시아는 뒤떨어져서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발전했기에 혁명을 겪었다고 보아야 한다.

역동적 조직 볼셰비키당

러시아의 전제정은 급격한 발전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을 제어하는 데 서툴렀고, 가뜩이나 휘청대는 전제정에 세계대전으로 과부하가 걸렸다. 마침내 전제정은 1917년 이른 봄에 무너졌고, 그 권력 공백을 임시정부가 메웠다. 그러나 억압에서 풀려난 대중은 정치의 민주화를 넘어서서 권위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의 위계구조 자체를 혁파하기를 바랐다. 평등을 추구하는 이 바람을 정확히 간파한 유일한 정치 세력이 볼셰비키였고, 이들이 최종 승자가 되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를 세웠다. 이 승리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 대중의 요구를 재빨리 알아채는 능력의 결과였다. 또한 이 능력은 볼셰비키당 안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한 결과였다. 통념과 달리 1917년의 볼셰비키당은 내부 논쟁과 토론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역동적 조직이었다.

걸음마를 뗀 신생 권력은 엄청난 시련을 맞이했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를 압살하고자 자본주의 열강들이 봉쇄와 무력 개입에 나섰고, 러시아 내부에서는 혁명과 反혁명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벌어졌다. 볼셰비키가 희망을 걸었던 독일의 사회주의 혁명은 1919년 초에 실패했다. 유럽에서 러시아 혁명은 고립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구원은 뜻밖의 방향에서 찾아왔다.

제국주의의 침탈에 시달리던 아시아 대륙의 피억압민족이 러시아 혁명을 반겼다.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의 젊은이들이 볼셰비키가 내건 제국주의 타도의 기치 아래 모여들었다. 조선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사실은 1920년에 모스크바에서 미국의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이 벗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드러난다.

“내가 사는 곳의 주된 매력은 여기서 지내는 사람의 유형이 점점 다양해진다는 거야. 중국인, 조선인, 일본인, 인도인이‘10월 혁명’의 성과를 배우고 자기 나라의 해방 과업에 필요한 도움을 얻으려고 이리로 온다니까.”

해방을 꿈꾸는 조선인들과 혁명 러시아의 밀월 관계는 1920년 7월 19일에 찍힌 사진에 포착되어 있다. 페트로그라드(오늘날의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제3인터내셔널 대회를 축하하는 레닌의 연설을 듣는 청중 사이에 태극기가 있다. 태극기를 치켜든 이들은 러시아 현지의 한국인들과 조선에서 온 대표단으로 추정된다. 이 사진은 러시아 혁명이 세계를 뒤흔들었다는 존 리드의 표현이 과장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격돌하는 전선보다 치열했던 내부

한편, 반혁명과 격돌하는 전선이 아니라 혁명의 내부에서 더 어려운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중은 특권과 불평등을 없애겠다는 약속을 했기에 1917년에 볼셰비키 편에 섰다. 볼셰비키는 이 약속을 지키려 했지만, 상황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전쟁, 혁명, 내전으로 말미암은 혼란과 봉쇄가 맞물리며 경제가 무너져 대중은 내전기 내내 굶주렸다.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로 올라선 볼셰비키는 민주주의보다는 효율을 더 앞세웠고 혁명의 생존에 필요하다며 위계제를 되살렸다.

새로운 형태의 특권과 불평등이 나타났다. 이상과 현실의 불협화음은 다음과 같은 엠마 골드만의 목격담에서 엿보인다.“나는 스몰니(볼셰비키당 본부) 안에 별개의 식당이 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고 나서 느낀 놀라움을 기억한다. 한 식당에서는 소비에트와 제3인터내셔널의 요인들에게 푸짐한 건강식이 주어졌고, 다른 한 식당은 평당원용이었다. 한때 식당 셋이 있었던 적도 있다. 해군병사들이 이것을 알아버렸다. 그들은 우르르 몰려와 그 세 식당 가운데 둘을 닫아버렸다. 그들은“우리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나누도록 혁명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볼셰비키 지도부가 타락해서 특권을 누렸다고 볼 수는 없다. 지도자의 특권은 업무의 효율을 위한 것이며 업무의 효율은 혁명의 생존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별도의 식당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에서 그토록 혐오하던 위계제의 부활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대중은 볼셰비키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1921년에 러시아 혁명은 반혁명을 물리치고 생존했다. 그러나 특권을 누리는 자가 뒤바뀌는 혁명은 살아남았지만 특권을 낳는 사회구조 자체를 없애려는 혁명은 이미 숨져가고 있었다. 혁명에는 딜레마가 있다. 대중은 위계제의 타파를 염원하며 혁명을 일으키지만, 지도자들은 혁명이 생존하려면 위계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혁명의 생존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되살아나는 위계제에 실망한 대중은 혁명에게서 멀어진다. 러시아 혁명은 이 딜레마를 비켜가지 못했고, 그 궁극적 결과는 1991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였다. 훗날 있을지 모를 또 다른 혁명의 성공 여부는 러시아 혁명을 괴롭힌 저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내는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류한수 상명대·역사콘텐츠학과


영국에식스대에서박사를했다. 대표논문으로 「공장작업장의러시아혁명: 작업반장과 노동자의 관계를 통해 본 작업장 권력 지형의 변동」, 공저서로 『러시아의 민족정책과역사학』, 역서로 『1917년러시아혁명: 노동계급이권력을잡다』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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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사 2019-03-15 17:43:39
교수님 말씀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한 단어 한 문장마다 중요한 의미가 가득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