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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랑의 시대 물거품처럼 파란만장하게 떠다닌 정치극의 창시자
격랑의 시대 물거품처럼 파란만장하게 떠다닌 정치극의 창시자
  • 서장원 고려대 독일문화정보학과
  • 승인 2017.09.14 1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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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21. 에르빈 피스카토르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Erwin_Piscator#/media/File:Piscator-Portrait.jpg

르빈 피스카토르(Erwin Piscator, 1893~1966)라고 하면 뉴욕에서 ‘드라마 워크숍’을 운영했다는 것이 제일 먼저 화제가 되는 인물이다. 그 다음이 정치극의 창시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조금 더 들어가면 서사극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 들린다. 대략 그 세 가지다. 하지만 이정도의 이야기만 가지고도 피스카토르에 대한 호기심이 서서히 발동한다. ‘드라마 워크숍’, ‘정치극’, ‘서사극’. 연극사의 중요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에르빈 피스카토르야 말로 20세기 연극사에서, 그리고 독일 망명 지식인사에서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에르빈 피스카토르는 독일의 극장장이었고, 연출가이자 연극교육자다. 바이마르 공화국시절 무대기술을 확장시켜 연극을 정치법정으로 끌어낸 영향력 있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다. 영화 필름, 사진 슬라이드, 엘리베이터, 컨베이어(conveyor)의 복합적인 배열을 통해 극중 사건을 논평했고, 무대를 서사적 파노라마로 확장시킨 인물이다. 정치극을 개발했고, 연출에 서사적 요소를 가미해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이론 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24년 소설가 알프레트 되블린은 피스카토르의 연출을 보고 “시적으로 불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서사적이다”라고 한 말에서 통상 피스카토르를 서사극의 원조로 치부한다.

베를린-모스크바-뉴욕-서베를린, 선명한 망명과 귀환의 흔적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처럼 새로운 물결과 스타일이 차고 넘치는 문화가 꽃피던 시절이었다. 모던의 시대였고, 아방가르드의 시대였다. 아방가르드는 문화를 새롭게 작동시켰다. 새로움은 단기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됐다. 여러 방향으로의 운동, 여러 종류로 뚜렷하게 나타난 예술, 그것이 아방가르드였다. 그리고 그 중심이 베를린이었다. 그렇게 베를린 연극은 선두를 달리며, 완전히 새로운 것을 계속 발견하고 그 방법으로 연출하고 있었다. 막스 라인하르트, 에르빈 피스카토르, 레오폴드 예쓰너가 바로 그 운동의 대표자였다.

피스카토르를 개인사적 측면에서 그의 인생을 10년 단위로 잘라서보면 열 살에는 마르부르크 소재 김나지움 학생, 20세에는 뮌헨 궁정극장의 배우, 30세에는 베를린에서 극단장, 40세에는 모스크바에서 영화감독, 50세에는 뉴욕에서 연극학교 교장, 60세에는 서독에서 객원감독, 70세에는 서베를린에서 극장장이라는 단면이 보인다. 그리고 80세는 없다.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피스카토르를 단면적으로 본 인생이다. 평생을 연극인으로 산 이력서가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고국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30세에는 베를린, 40세에는 모스크바, 50세에는 뉴욕, 60세에는 다시 서독으로 떠돌아다닌 삶이다. 전형적인 망명과 귀환이주의 흔적을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에르빈 피스카토르는 칼빈파의 상인 가족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섬유공장을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가계로 보면 신학자이자 성서번역자인 요하네스 피스카토르의 자손이었다. 요하네스 피스카토르는 1600년에 원래 ‘핏셔 (Fischer)’였던 성을 똑같은 의미의 라틴어 단어인 ‘피스카토르’로 개명했다. ‘핏셔’는 독일어로 ‘어부’이고 라틴어로도 ‘어부’다. 순 한글 성을 한자로 바꾼 셈이다. 그만큼 뼈대 있는 가문을 만들려 했고,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후손들도 그러한 자부심속에 대대로 살아온 집안이었다. 연극은 어려서부터 했다. 어린 학생시절 연극을 한 번 해본 적이 있는데, 연극이 너무 좋아 그대로 연극에 입문했다.
 

▲ 1906년 함부르크 시절의 피스카토르 가족 사진. 김나지움에 입학한 무렵의 사진으로 보인다. 아버지 칼 옆이 피스카토르다. 가족사진 출처http://erwin-piscator.de/piscators-biographie/

피스카토르의 인생관이 확립되고 연극의 방향을 결정한 결정적인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피스카토르는 서부전선에 (그중에서도 벨기에) 투입돼 진지전을 경험했다. 1915년에는 심한 부상까지 당했다. 전쟁경험은 그를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로, 전쟁 미치광이들을 조롱하고 막아내려는 반군국주의자로 만들었다.

사상보다 실험성 중시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켜 자본주의, 제국주의, 군국주의를 붕괴시킬 목적으로 결성 된 스파르타쿠스단에 입단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은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사회주의 운동단체였는데,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가 살해된 후 곧 독일공산당이 됐다.

이러한 정치적 참여는 뼈대 있는 신학자집안 자손으로,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가업을 이어야 할 사람에게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켜야 했다. 비판하고 투쟁해야 했다. 바로 연극을 통해서. 그렇게 해서 피스카토르의 정치극이 탄생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 예술인들과 함께 다다이즘 운동에도 참여했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입각해 전 세계의 부르주아 예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배격하는 운동이었다.  
  
1920년 헤르만 쉴러와 함께 ‘프롤레타리아 극단’을 인수했다. 새로운 창립이나 마찬가지였다. 창립 목적은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통해 의식적으로 선전을 하는 것이었다. 피스카토르는 “우리는 우리 프로그램에서 ‘예술’이라는 단어를 극단적으로 배격한다. 우리들의 작품은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개입하고 정치화 시킨 외침이다”라고 분명히 규정했다.

‘프롤레타리아 극단’이 내세운 것은 처음부터 계급투쟁을 위한 도구였다. 관객은 노동자들이었다. 배우도 노동자들로 아마추어였다. 일정한 극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찾아다니며 공연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랬다. 1년 남짓 7편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공산당은 피스카토르의 연극을 의심하고 미심쩍어했다. 굳이 공산당이 아니더라도 피스카토르의 연극을 자세히 살펴보면 완전히 새로운 이념위에 새로운 형태의 연극 같지만 사실은 19세기 말에 등장한 ‘민중극단(Volksbuhne, 폭스뷔네)’의 전통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스카토르는 공산주의자로서 연극을 한다기보다는 아방가르드 예술가였다. 사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술에 비중을 둔 전형적인 연극인이었다. 피스카토르는 시도해보고 실험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였다.

1924년 5월 베를린 민중극장에서 알폰스 파퀘의 『깃발(Fahnen)』을 무대에 올렸다. 원작자의 작품내용은 시카고 노동자들의 투쟁과 노조지도자의 처형을 그린 것인데, 피스카토르는 이 작품을 보며 1918년 독일 11월 혁명이 발생한 후 혁명 주동자가 처형되고 독일 노동자들이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투쟁하는 광경을 떠올렸다. 그리고 즉시 두 사건을 연극 무대에 평행하게 올렸다. 종래의 ‘연극 줄거리 위주의 기본 틀’을 깨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시도였다. 공연 중 슬라이드를 통해 표어, 인용문, 구호들을 관객들에게 알려주었다. 표어, 인용문, 구호를 외치는 것은 바로 시위현장에서 생생하게 목격되는 광경이었다. 그 이외에도 영상, 멜로디, 노래 등을 삽입해 현실감을 높였다. 연극을 통해 관객들이 정치현실에 참여하는 것과도 같은 수법이었다.

▲ 피스카토르는 1924년5월 베를린 민중극장에서 알폰스 파퀘의『깃발(Fahnen)』을 무대에 올렸다.

배우와 관객이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배우와 관객이 함께 있는 것이다. 연극은 보기만 하고 감상하는 예술이 아니라, 이제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은 나의 일이고 내가 참가해야 하는 정치 사회적 현실이었다. 피스카토르의 이 연출 수법을 몇 년 후 브레히트가 차용해 대 성공을 거두자, 피스카토르는 1929년 그의 책 『정치(연)극』에서 ‘서사극의 개념과 방법의 원조는 피스카토르’라고 선언했다. 그 이전에도 이미 알프레트 되블린이 지적해준 바가 있었다. 원조를 논하는 것도 좋지만 정치극에서 서사극이 태동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연)극’이라는 것이 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관객에게 영향을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변화를 야기 시키려는 목적으로 연극을 한다는 새로운 연극관이 곧 정치극의 본질이다. 무의미한 전장에 끌려가 제대 후 처녀를 만나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젊은이가 머리에 총을 맞고 화장실 벽에 골이 뿌려진 현실을 보며 인간과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던 피스카토르의 정치극은 사회변화를 위해 비판하고, 도전하고, 투쟁했다. 피스카토르의 정치극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새롭고 강렬한 연극형식이었다.

1931년 영화제작 위해 소련 방문…스탈린이 ‘초연’ 관람하기도

1927년 ‘피스카토르 뷔네’라는 이름으로 1천100석을 갖춘 본인 소유의 극장을 개관했다. 16명의 전속 연기자, 1명의 드라마투르기, 8명의 기사, 5명의 영업사원을 둔 완벽한 극단 극장이었다. 피스카토르 집단이 형성된 것이다. 대기업의 재정적 후원도 받았다.

▲ 노년의 피스카토르

이제 초반에는 실험극 정도였던 정치극이 완전한 한 장르로 독립성장해 노련하고 종합적인 공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에른스트 톨러의 『아이고, 우리 살아있네!(Hoppla, wir leben!)』를 무대에 올렸다. 에른스트 톨러는 뮌헨 평의회공화국 수반으로 뮌헨혁명에 앞장섰지만 5일 천하로 끝난 비운의 혁명가였다. 그의 삶이나 정치적 이념은 그대로 당시 독일 정치의 현실이자 상징이었다. 톨러는 사회적 이상이었고, 그의 실패는 언젠가 만회해야 할 진보주의자들의 과제였다. 이로 인해 피스카토르에게는 가장 적합한 정치극의 대상이었다. 이 공연에서는 ‘同時舞臺(simultaneous set)’ 수법이 동원돼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공간을 설치해 무대장치를 굳이 교체하지 않고도 여러 장면과 인물들을 등장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수법을 사용하여 피스카토르는 연극을 총체 예술작품으로 끌어 올렸다. 이 연출 이후 계속해서 성공적인 무대공연이 이어졌다. 이제 에르빈 피스카토르는 명실 공히 베를린 연극계에 최고의 감독이 됐다. 막스 라인하르트도 있었지만 그는 다른 의미에서 최고의 연극인이었다. 사실상 둘은 서로 대척점에 있던 관계였다.

1931년 영화제작을 위해 소련에 갔다. 무르만스크와 흑해연안의 도시 오데사였다. 안나 제거스의 작품 『어부들의 봉기』 영화제작을 위해서였다. 선주의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 항거해 봉기를 일으키는 어부들에 관한 이야기다. 촬영은 중단되기도 하며 이럭저럭 1933년까지 지속됐다. 그러는 사이 독일에는 히틀러 나치정권이 들어섰다. 귀국할 수도 없었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1934년 모스크바에서 「어부들의 봉기」가 개봉됐다. 초연에는 스탈린도 참여했다. 그해 11월에는 ‘국제 혁명 연극연맹 (IRTB)’ 의장에 피선됐고, 조국 독일에서는 국적을 박탈당했다. 1936년 소련에서 프랑스로 망명했다. 소련도 독일 못지않은 독재주의 국가였다. 그러던 중 밀고까지 당했고, 외국인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살만한 곳이 아니었고, 살수가 없었다. ‘국제 혁명 연극연맹’ 의장 자격으로 소련에서 빠져나왔다. 막스 라인하르트가 있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머문 후 파리로 갔다.

프랑스에서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베를린에서 쌓아올렸던 그 금자탑 같던 연극기법을 어디에고 연결시킬 수 없었다. 더 이상 성공은 없었다. 그러던 중 1938년 6월 2일 브로드웨이 프로듀서 길버트 밀러 (Gilbert Miller)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극화하기로 계약했다. 미국으로 가기위한 전초작업이 된 셈이다. 1939년 1월 1일 뉴욕에 도착하며 미국 망명생활이 시작됐다. 미국 도착 환영식은 모리스사가 주선했다. 기자들이 부두 선착장에 오고, 사진기자가 와서 사진도 찍고 인터뷰도 했다. 이렇게 요란법석하게 환영행사를 준비한 것은 길버트 밀러가 피스카토르의 공산주의 이력을 숨기기 위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곧 들통이 났다. 공산주의 언론이 ‘피스카토르 동무 미국 입국 환영!’이라는 기사를 냈기 때문이다. 피스카토르에게 미국은 또 다른 어려움이 있는 나라였다. 『전쟁과 평화』는 극화되지도 않았다. 그냥 뉴욕에만 온 셈이 됐다. 피스카토르는 원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브로드웨이에 올릴 생각이었으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 뉴 스쿨 오브 소셜 리서치’에 ‘드라마 워크숍’을 창립하는 데 집중했다. 이 대학은 독일에 나치가 집권하던 시절 독일 망명 지식인들의 집합소였다.

미국에 도착한 그해 5월 망명대학인 ‘뉴 스쿨 오브 소셜 리서치’ 총장 앨빈 존슨 (Alvin Johnson, 1874~1971)과 접촉했다. 그리고 1940년 초 ‘워크숍’을 창설해 신입생 20명으로 학교를 시작했다. ‘드라마 워크숍’은 연기학교이기도 했다. ‘드라마 워크숍’은 여러 면에서 피스카토르가 생각하는 정치극의 이상을 다른 방식으로 계속할 수 있는 곳이었고, 또 다른 면으로 보자면 망명의 피곤함 속에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이고, 철저히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나라였다. 정치극의 이상을 실현시킨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나라였다. 그래도 피스카토르는 수업방식이나 작품선정은 정치극의 범주를 따랐다. 정치극은 동조자(지지자)를 만든다는 신념도 버리지 않았다.
 
피스카토르는 인정받는 연극인이었지만 그들 테두리안의 사람은 아니었다. 피스카토르는 그가 지니고 있던 연극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실기를 가르쳤고, 결과적으로는 연극교육자라는 이름으로 연극사에 남게 됐다. ‘드라마 워크숍’ 출신으로는 현대 미국의 대표적인 극작가인 테네시 윌리엄스, 「대부」로 명성을 날린 배우 말론 브란도, 「뜨거운 것이 좋아」의 배우 토니 커티스, 「Day-O(The Banana Boat Song」의 가수 해리 벨라폰테 등 유명한 인물들이 많다. 그래서 ‘드라마 워크숍’도 유명해 졌다.

매카시선풍에 미국 떠나 다시 서독으로…격랑의 끝에서

2차 대전 후 매카시선풍이 미국을 강타하자 에르빈 피스카토르는 非 미국적인 전직 공산주의자로 심문을 받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심문을 받아 봤자 그들의 의심을 비켜나갈 수 없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대로 미국을 떠나 1951년 서독으로 귀환했다. 학교는 부인에게 맡겨둔 채였다. 그리고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조국을 떠난 지 20년 만의 귀환이주였다. 고향도 고향이 아니었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피스카토르가 1920년대 유명한 연극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옛날 무대에 기술을 도입한 연극무대의 기술자 정도의 취급이었다. 피스카토르가 기술을 도입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도덕성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는데도, 엉뚱하게 비하를 하고 있었다. 망명으로 인해 연극인생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소련 망명 중 스탈린의 행태를 보고, ‘공산주의야 말로 문제가 있구나하고 서유럽을 거쳐 망명을’ 떠났고, 미국에서는 전직 공산주의자로 몰려 고향으로 도망치듯 돌아왔는데, 고향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공산주의자로, 정치 선동가로 보고 있었다. 환영하는 사람들이 없었고, 설자리가 없었다. 한때 베를린의 연극계를 주름잡던 연극사적인 인물이 이곳저곳 지장의 객원 연출가로 일했다.    

▲ 피스카토르가 1927년‘피스카토르 뷔네’라는 이름으로 개관한 1천100석 규모의 본인 소유 극장

피스카토르는 1956년 일기에서 다음과 같은 독백을 했다. “(망명을 한 후) 히틀러의 간접적인 결과로 소련에서는 치명타를 입었다. 예술이나 정치적으로 실신상태였다. 프랑스에 있던 2년은―이름은 있었지만―‘제로(Zero)!!’였다. (…) 미국, 가능하지 않은 나라! 나의 무능력을 적응시키기에 조건들은 불가능했다! 14년간의 死鬪! 1951년부터 독일 (…) 죽었다. (…) 독일에서 죽어 산 것이 확정적으로 끝나기에는 5년이 더 걸렸다. 『당통의 죽음』 (게오르크 뷔히너 작품)은 나의 연출을 연착시켰다.”

피스카토르는 격랑의 시대를 물거품처럼 파란만장하게 떠다닌 정치극의 창시자였다. 새로운 무대기법으로 연극을 부흥시키며 시대를 비판했고 사회변화를 위해 투쟁했지만 망명을 떠난 후 어느 곳에서도 주역은 되지 못했다. 스탈린주의의 폭력성을 보며 공산주의에서 도망쳤고, 자본주의 미국사회에서 연극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었을 뿐더러 쫓겨나기까지 했다. 시대는 거대한 격랑의 파도였다. 괴물처럼 몰려 닥치는 파도는 그를 삼켜 저 멀리 떠돌아다니는 물거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물거품의 흔적이 있기에 세상이 험악했다는 것을 후세의 사람들은 안다.   
 

 

서장원 고려대 독일문화정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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