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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키팅 선생’을 위한 변명
[기자수첩] ‘키팅 선생’을 위한 변명
  • 설유정 기자
  • 승인 2003.01.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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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톱 치고 키스하는 게 현대 미술의 이햅니까. 교육방법으로 활용은 할 수 있지만 그걸 평가에 반영했다는 것이 못마땅한 겁니다.” (경북대 학사지원과의 한 담당자)

“다음학기 강의는 안 맡기려고 합니다. 열심히 한 의욕은 인정하지만 이렇게 물의를 빚었는데 도의적으로 그래야 하지 않겠어요.” (경북대 미술학과의 한 교수)

지난 12월 치러진 경북대 ‘미술의 이해’ 과목 기말고사 문제를 둘러싼 비판이 매섭다. 학문적 성취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게 시험이라는 그들의 ‘평범한’ 교육적 견해는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경북대 홈페이지와 ‘이 시대의 진정한 교수, 정효찬’이란 카페에 가득한 “이런 강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정 선생님이 다시 강단에 서실 수 있느냐”라는 네티즌들의 ‘목마른 아우성’은 과연 우리 대학사회에 무엇을 시사하는가. 문득 학생과 눈을 한번도 마주치지 않고 강의하시던 학창시절의 한 노교수님이 떠오른다.

재수강해도 토씨하나 안 바꾸는 교수, 몇 십 년째 도는 족보에도 개의치 않는 대학, 학생들의 불만은 바로 이 지점에 맞닿아 있다. 고등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은 대학 교육에 대해 한번쯤 실망해본 적이 있는 사람, 어느 대학에선가 수업시간에 라면을 끓이고 비닐봉지를 뒤집어썼다는 이야기에서 문득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떠올린 사람, 이들이 바로 한 젊은 강사와 1백20명의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나눈 교감에 뜨거운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 언론이 이를 ‘엽기’로 뭉갤 때 분노하고, ‘중·고교’ 아닌 ‘대학’, ‘수학’ 아닌 ‘예술’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변화와 탐색의 금제를 안타까워한다.

좀 ‘튀면’ 어떤가. 서로 설득하고 바꿔나가는 과정에서 모든 학문과 사회가 발전하는 게 아닌가. 이번 파문으로 대학가가 스스로의 ‘지적 매너리즘’과 ‘결과 지상주의’를 돌아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설유정 기자 syj@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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