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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게 벽을 덮는 담타기전문가
푸르게 벽을 덮는 담타기전문가
  •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 승인 2017.09.12 1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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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 184. 담쟁이덩굴
▲ 담쟁이덩굴 사진출처=한국식물생태보감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은상이 노랫말을 짓고, 박태준(1900~1986)이 작곡한 애창가요다. 1922년 작으로 처음 제목은‘思友’였으나 이를 순우리말‘동무생각’으로 제목을 바꾸었다한다. 이 노래는 작곡가 박태준의 고향인 대구달성공원동쪽에 있는‘언덕(東山)’을 배경으로 하고, 작곡가의 숨은 짝사랑 이야기가 숨어있다.

‘백합 필적에’의 白合은 박태준의 외짝사랑인 경북 여고생의 校花이고, ‘흰 나리’는‘백합’의 순우리 말이다. 그럼 청라언덕의‘靑蘿란? ‘푸른(푸를靑) 담쟁이덩굴(담장이넌출蘿)’을 뜻한다. 그 뜻도 모르고 마냥 노래를 불러재꼈으니…. 그리고 담타기전문가(담쟁이)의 한자명 파산호(爬山虎)는‘산(山)에서 기어 다니는(爬) 사납고 모진(虎) 풀’이란 뜻이고, 地錦이라고도 부르니‘땅의 비단’을 일컫는다.

그리고‘-장이’와‘-쟁이’의 쓰임새가 달라서, 보통 기술자에게는‘-장이’를 붙이고 나머지는‘-쟁이’로 쓴다고 한다. 그래서 미장이·대장장이·기와장이 등은 수공업적인 기술과 연관이 있는 말이고, ‘관련된 일을 전문업으로 하는 경우’는 멋쟁이·소금쟁이·과학쟁이 등으로 쓴다. 한마디로‘담쟁이’가‘담장이’보다 한 수 높은 말이다.

담쟁이덩굴(grape ivy/Japanese ivy)은 포도과의 낙엽활엽덩굴성목본식물로 동아시아(한국·일본·중국동북부)원산이고, 돌담이나 바위 또는 나무줄기에 붙어서 앞 다퉈, 끈질기고 세차게 불모지를 기어오른다. 담쟁이덩굴은 나무(木本)이기 때문에 자라면서 나무껍질(樹皮)이 발달하고, 줄기도 해마다 굵어진다.

담쟁이덩굴은 덩굴식물이만 실제로는 물체를 감고(twisting/coiling)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타고(creeping)오르고, 오래된 토담이나 돌담과 어우러져 연두색 냄새를 물씬 풍기는 멋진 風光을 창출한다. 여름엔 건물 벽을 두둑이 덮어 더위를 식혀 줄뿐더러 눈이 시원한 原初의 色인 연초록을 안겨주고, 가을에는 단풍이 예뻐서 관상용으로 많이들 심는다.

줄기는 30m 이상 길게 사방팔방으로 뻗고, 잎과 마주나는 덩굴손끝자리엔 영락없이 청개구리발가락 모양새를 한 둥글납작한 빨판(吸盤,sticky pad)이 있다. 빨판은 지름 5mm남짓인 것이 한 번 딱 달라붙으면 영 떨어지지 않고 꿋꿋이 버틴다. 빨판은 시멘트성분인 탄산칼슘(calcium carbonate)을 분비해 벽에 덕지덕지 달라붙는데 벽을 녹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붙을 뿐이다. 그러나 억지로 떼면 벽이 상하지만 원줄기를 잘라버려 빨판이 삭아 떨어질 때는 아무런 탈이 없다.

담쟁이덩굴(Parthenocissus tricuspidata)의 학명의 속명 Parthenocissus는 그리스어로 처녀(parthenos)와 덩굴(kissos)의 합성어로 꽃가루받이 없이도 종자를 생산하는 담쟁이덩굴의 특성(處女生殖)으로부터 유래했고, 종소명 tricuspidata는 겹잎(複葉)을 구성하는 소엽(leaflet)이 세 개란 뜻이 담겼다. 한국·일본· 타이완·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비슷한 종류로 외래종인 미국담쟁이덩굴(P. quinquefolia/Virginia creeper)이 있는데 잎이 5장의 소엽(잔잎)으로 구성됐기에 영판(아주) 손바닥모양이다.

반질반질하게 기름기 도는 잎은 작은 틈새 하나 없이 겹겹이 빽빽하게, 가지런히 자리하고, 잎사귀 끝은 뾰족하면서 모조리 아래로 향한다. 또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톱니(鋸齒)가 있고, 잎자루(葉柄)는 잎몸(葉身)보다 길다. 잎은 가을에 붉게 물든다. 여름엔 짙푸른 그늘을 누리게 하고, 가을에는 고운 단풍까지 주는 고마운 담쟁이로다! 한 꽃 속에 수술과 암술이 모두 있는 양성화이고, 6∼7월에 황록색으로 피며, 가지 끝 또는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꽃대에 많은 꽃이 한가득 모여 달린다. 꽃잎은 길이 2.5mm의 좁은 타원형이고, 꽃잎과 수술은 각각 5개씩이고, 암술은 1개이다. 열매는 흰 가루를 덮어썼고, 지름이 6∼8mm로 8∼10월에 검게 익으며, 종자 1∼3개가 들었다. 물열매(漿果)로 구슬모양(球形)이고, 이듬해까지 끈덕지게 매달려 있다. 열매에 독성이 있는 옥살산(oxalic acid)이 들어있어서 사람이 먹으면 콩팥에 해롭고, 치명적이지만 야생조류나 설치류 따위는 전혀 무해해 겨울양식으로 삼는다.

새순은 봄에, 줄기와 뿌리는 여름에 채취해 햇볕에 말려서 약으로 쓰고, 줄기를 달여서 엿을 만들어 먹는다. 한방에서 타박상 따위로 살 속에 피가 맺히는 어혈을 풀어주고, 관절과 근육의 통증을 가라앉히며, 신경통, 당뇨, 기침, 가래, 중풍에도 쓴다고 한다. 세상에 풀치고 약 아닌 게 없도다.

도종환의 시‘담쟁이’다.“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결국 그 벽을 넘는다.”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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