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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자라나게 하는 힘은 시민들의 ‘생각 능력’”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자라나게 하는 힘은 시민들의 ‘생각 능력’”
  • 김명석 /국민대 교양대학·철학
  • 승인 2017.09.0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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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호-김명석의 필로폴리스_ 3. 생각공화국

우리 공화국에 필요한 힘은 무엇인가?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있는 우리 부모 가지고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고. 돈도 실력이야”라는 2014년 12월 정유라의 글은 2016년 10월에 와서 대한민국을 들끓게 했다. 나는 그의 말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 오래된 생각은 2007년 12월에 이미 이 나라에 공식화됐다.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나 “도덕이 밥 먹여 주지 않는다”라는 고귀한 말씀을 받아들인 이 나라의 많은 시민들이 이명박을 행정수반으로 선출했다. 더 앞서서 2006년 8월 <조선일보>는 “차라리 비리가 더 낫겠다”라는 칼럼을 실었다. 이명박이 비록 비리가 많지만 그가 우리를 더 잘 살게 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동료 교수의 2007년도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2008년 봄학기 한 수업에서 미래 대통령을 꿈꾼다는 한 학생이 올바름보다 실력이 우선한다면서 부모 학벌과 자산이 곧 자기 능력의 일부라고 당당히 주장할 때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거의 모든 세대들에 퍼진 이러한 밈(편집자. Meme: 한 사람이나 집단에게서 다른 지성으로 생각 혹은 믿음이 전달될 때 전달되는 모방 가능한 사회적 단위를 총칭한다)을 당시의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정말 생존을 위해 도덕이나 정의보다는 실력과 능력이 우선하는지 모른다. 자연 세계에서는 힘이 도덕의 정당성을 평가하지 도덕이 힘의 정당성을 평가하기 못한다. 이 과학이 악령처럼 우리를 사로잡았던 지난 10년 동안 이 나라의 엄청난 능력자들과 실력자들이 우리의 공화국을 좀먹고 있었다. 

 

노동자와 시민의 일반 역량으로서, 사고능력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키는 일은 오늘날 우리 공동체의 과제 중 하나가 돼야 한다. 단호하게 교육, 선발, 채용, 보상 등에서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전환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공화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민주’는 이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 있고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하지만 ‘공화국’이라는 말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다. 이 낱말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라틴어 계열 낱말 ‘republic’에서 왔고 더 멀리는 라틴어 ‘r?s publica’에서 왔다. ‘레스 퍼블리카’의 뜻은 그냥 ‘공동물’ 또는 ‘공동의 소유물’ 등을 뜻한다. 로마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공동의 것’이라 불렀던 때는 기원전 509년 왕정을 폐지한 다음부터 기원전 27년 제국이 시작되기 전까지 시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당시에는 몇몇 적은 우두머리들이 국가의 주권을 갖고 있었던 때였는데, 그들은 그 나라를 ‘자기들 것’이라는 뜻으로 ‘공동의 것’이라 불렀을 것 같다. 로마 공화정은 귀족들이 나라의 주권을 골고루 가지되, 다만 각 귀족이 자기 권력을 마구 휘두르지 못하게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뒀다. 이것은 명문가 출신들과 비명문가 출신 정치인들 사이의 오랜 정치 투쟁의 결과로 생겨났다. 권력 분리, 견제, 균형 원칙이 나타났고, 이런 요소가 오늘날 ‘공화정’ 또는 ‘공화국’의 원형이 됐다. 

17세기 이전까지 유럽에서는 복수의 지배자가 아니라 한 명의 지배자 곧 군주가 다스리는 국가도 ‘공화국’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나랏일을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하는 전제 군주는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런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는 공화국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미국혁명, 프랑스혁명 등을 거치면서, 17세기 이후부터 공화정이란 나라의 통치자 또는 통치자들이 세습 군주가 아니라 헌법에 따라 주기를 갖고 지명 내지 선출되는 정치 체제를 뜻하게 됐다. 이와 같은 의미 변화는 미국에서 ‘리퍼블릭’의 용례에 잘 나타나 있다. 미국어에서 ‘공화’는 세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통치권을 가진 이들은 선출되거나 선발돼야 한다. 둘째, 그들은 공동의 이익 곧 시민들 집단을 대변해야 한다. 셋째, 그들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힘을 행사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이 나라가 귀족 공화국이나 과두 공화국이 아니라 민주 공화국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크던 작던 통치권을 가진 이들은 부모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 능력으로 선출 또는 선발돼야 한다. 그들은 시민들의 공동 이익을 좇아야 한다. 그들은 법률에 명시된 대로 권력 분리, 견제, 균형 원칙에 따라 힘을 행사해야 한다. 우리 헌법의 선언이 완성될 때까지 이 나라는 줄곧 자라나야 한다. 이 나라를 완성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우리 공화국은 시민 누구에게나 행정 집행과 사법의 권한을 주지는 않는다. 공직자들은 시민들을 대변해 이 나라의 권력을 집행하고 입법 및 사법 권력을 행사한다. 결국 이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 있고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선언을 가장 잘 실현하는 과정은 공직자 선출이다. 우리 민주공화국의 적들은 곳곳에 있다. 투표하지 않는 이들의 게으름, 공동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이들에게 투표하는 시민들의 어리석음, 공공의 이익에 우선해서 소수의 이익이나 자기 이익을 탐하는 탐관오리들, 헌법과 법률 너머의 힘을 행사하는 적폐 권력기관들. 사실 내가 가장 주목하는 적은 공동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이들에게 투표하는 시민들의 어리석음이다. 바로 이 점에서 대한민국을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자라나게 하는 힘은 바로 시민들의 생각 능력이다. 

시민들로 하여금 최고도로 발휘하게 할 능력은 생각 능력

우리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능력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요구되는 능력과 역량도 다르다. 21세기 시민들과 공직자들에게 우리는 어떤 역량을 갖추도록 요구해야 하는가? 시대마다 당대의 목표가 있고 이를 이루기 위해 특정 성취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최초의 국가고시인 신라의 독서삼품과는 유교 경전을 얼마나 숙달했느냐에 따라 응시자들을 하품, 중품, 상품으로 나눴다. 특히 『오경』, 『삼사』, 『제자백가서』를 널리 통달한 이는 특품으로 특채하기도 했다. 얼마나 책을 많이 읽었느냐, 얼마나 많은 것을 외우고 있느냐, 외국 말을 얼마나 잘 하느냐 등은 문명을 만들기 위해서 정말 필요했던 능력이었고, 현재 우리 시대에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는 정말로 많이 다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두 가지 주요 특징을 갖고 있다. 하나는 시민사회의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화의 확대다. 이 둘은 지성정보사회의 피할 수 없는 특징이다. 시민사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다양한 가치를 지향하면서 점차 다원화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관료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시민들, 정보 수집 능력과 자본 동원력이 정부를 능가하는 기업들, 전문성과 지식을 바탕으로 정부와 기업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NGO와 노조,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강력하게 조직된 각종 이익단체들 등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면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 경제 정책과 교육 정책, 교육 법안과 복지 법안, 복지 문제와 실업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다. 에너지와 환경과 보건과 안보와 경제와 금융이 국제 간 네트워크 속에서 뒤엉켜 있다. 특히 제4차 산업혁명은 지성정보사회를 더욱 심화시켜 우리 사회를 근본 차원에서 바꿀지 모른다.

2016년 세계경제포럼에서 『미래 일자리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정부, 기업, 개인이 이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묻고 있다. 노동자의 역량 부족, 대규모 실업, 커지는 불평등 등과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취지다. 이 보고서는 노동자들의 역량을 ‘다시 다듬고 더 다듬는’ 것이 최악을 피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역량을 더 다듬고 다시 다듬어야 할까? 세계경제포럼의 발표에 따르면 제4차 혁명기에 우리가 주요하게 키워야 하는 10대 역량은 중요한 순서대로 나열하면, 복합 문제 해결, 비판 사고, 창의성, 인사 관리, 다른 사람과 협업, 감성 지능, 판단과 의사결정, 봉사 지향, 협상, 인지 유연성 등이다. 교육전문가 토니 왜그너도 미래의 일자리를 위한 7가지 핵심 기술 중에서 첫째로 비판 사고와 문제해결 능력을 꼽았다. 

노동자들이 다시 다듬고 더 다듬어야 하는 역량들의 목록에 암기 능력은 들어 있지 않지만, 대한민국의 시험들은 거의 암기 시험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20세기 대한민국 정부에서 영어, 전문 지식과 관련 법령의 숙지 및 암기 여부를 평가했다. 한반도의 중세부터 지금까지 지식 숙지 여부를 평가하는 방식은 우리의 입시 시험 등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각 시민들로 하여금 ‘최고도로 발휘하게’ 할 능력과 공직자들에게 특별히 요구해야 할 역량은 첫째, 복합 문제 해결, 비판 사고, 창의성, 의사결정, 인지 유연성 같은 사고능력이며, 둘째, 인사 관리, 협업, 감성 지능, 봉사 지향, 협상 등과 같은 다른 사람들에 감응하고 그들과 협력하는 능력이다. 

각종 입학시험 및 채용시험들에서 생각의 힘을 평가해야

암기 위주의 역량 평가가 얼마나 시대에 맞지 않는지는 여러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1956년 밴저민 블룸은 『교육목표 분류체계』에서 학습 또는 인지 과정을 기억, 이해, 적용, 분석, 평가, 창의 등 6단계로 나누면서 기억을 가장 낮은 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창의 영역은 객관 평가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해, 적용, 분석, 평가의 각 단계들에서 객관 평가는 충분히 가능하다. 2001년 앤더슨과 크레드올은 블룸의 연구를 심화해, 앞에서 말한 인지 과정뿐만 아니라 인지 내용을 사실, 개념, 절차, 메타 인지 등 4단계로 나눴다. 여기서 ‘사실’은 가장 낮은 단계의 인지 내용인데, 가장 낮은 인지 내용과 가장 낮은 인지 과정이 결합된 인지 수준이 바로 ‘사실 기억’이다. 컴퓨터, 인터넷, 인공지능 등이 보편화되고 있는 21세기가 돼서도 대한민국의 많은 역량 평가들이 사실 기억 수준에 멈춰 있다는 것은 거의 재앙 수준이다. 10대 20대 때 반짝 사실 기억을 다른 사람보다 잘 하는 것으로 전문가, 교수, 판검사, 공무원, 정치인 등 능력자 행세를 하는 시대는 끝내야 한다.

미래 세대와 현재 세대에게 어떤 역량을 키우도록 유도해야 하는지, 우리 사회가 무슨 역량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는 우리 공동체의 선택에 달려 있다. 미래 노동자들에게 닥칠 노동 환경 변화는 과거와 달리 그 변화 정도가 크고 빠르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지식 암기보다는 유연한 인지 능력을 갖도록 생각하는 힘 그 자체를 높여야 한다는 신호를 미래 세대와 동료 시민들에게 보내주어야 한다. 노동자와 시민의 일반 역량으로서, 사고능력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키는 일은 오늘날 우리 공동체의 과제 중 하나가 돼야 한다. 단호하게 교육, 선발, 채용, 보상 등에서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전환해야 한다. 

교육에서 이 변화를 이끌기는 매우 어렵다. 실제로 현재 중등교육 및 고등교육 내에서 사고능력과 협력능력 교육은 다소 소홀하다. 이 변화는, 고려시대 과거시험이 그랬듯이, 대학입시 시험이나 공무원 채용 시험 같은 곳에서 가장 먼저 앞당겨 실천할 수 있다. 현재와 같은 지식 암기 위주의 평가는 학생과 미래 노동자의 역량을 죽이는 철장과 같다. 사고능력 위주의 역량 평가는 이미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 시기에 차분히 진행됐다. 민간 기업에서도 사고능력을 평가하는 경향이 점차 커지고 있다. 2004년부터 5급 공무원 공채 시험에 사고능력 평가가 도입됐고, 2008년부터 법학전문대학원 입학시험에 도입됐다. 인사혁신처는 7급 공무원 공채 시험에도 사고능력 평가 시험을 도입하겠다는 사업안을 올해 발표했다. 서울과 같은 지방공무원 채용에도 이런 변화를 도입해야 한다. 

 

김명석 /국민대 교양대학·철학

물리학을 공부한 다음 언어철학 및 심리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북대 기초과학연구소, 중앙인사위원회 등에서 일했으며, 현재 국민대 교양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후기 분석철학의 인식론과 언어철학, 언어와 사고의 기원, 자유의지와 마음의 힘, 뜻 믿음 바람 행위의 종합 이론, 양자역학의 존재론 해석을 주로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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