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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콤플렉스와 수입 학문의 한계
서양문화 콤플렉스와 수입 학문의 한계
  • 박찬구
  • 승인 2017.08.30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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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박찬구 서울대·윤리교육과

이 글은 철학문화연구소가 발행하는 <계간 철학과 현실>(2017 여름 113호, 2017.6)에 실린 박찬구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의 「73학번의 회고와 반성」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최근에 논문심사를 하면서 필자는 수입 학문으로서 철학의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 주로 외국 저술을 참고한 논문들을 읽다 보면 영미식 언어분석 기법이나 어색한 수사학적 표현을 접할 수 있는데, 왜 우리가 그들의 언어구조와 표현방식에서 생기는 문제로 고민해야 하는지, 왜 우리에게는 별로 공감되지 않는 문제(pseudo question)를 가지고 씨름해야 하는지 답답할 때가 있다. 이러한 사이비 문제의식의 폐해는 단순히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언어의 벽, 문화의 벽을 실감케 함으로써 좌절감을 낳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문화적 콤플렉스에 토대한 식민지 학문의 틀 속에 가두고 만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성형수술 붐 배후에 서양인에 대한 외모 콤플렉스가 숨어 있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의 체험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의 성형수술 붐과 문화적 열등감의 관계를 깨닫게 된 것은 유학시절 내 나이 또래 독일 여성과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대화 중 필자가 “한국에서는 눈을 크게 만드는 성형수술을 많이 한다”고 하자, 이 여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니, 왜 눈을 크게 만드느냐”고 물었다. 필자가 다시 “그게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아니, 그게 왜 더 예쁘냐”고 되물었다. 이어서 필자가 “코를 높이는 수술도 한다”고 하자, 이번에는 더 깜짝 놀라며 “아니, 왜 코를 높이냐?”고 물었다. 필자가 “그게 더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하자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긴, 이들에겐 쌍커풀이 없어 눈이 작은 사람도, 코가 낮은 사람도 없다. 있다면 그게 곧 미인이다.) 하는 수 없이 “아마도 당신네들을 닮은 외모를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하자, 그녀는 깔깔대고 웃더니 자기네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제 비밀을 알았다”면서 “자기와 다르게 생긴 것을 동경하도록 만든 조물주의 장난”이라고 단언했다. 필자는 이 대화를 계기로 서양인에 대한 외모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은 유학을 통해 배운 그 어떤 철학적 지식보다도 중요한 깨우침이었고, 내 인생에서 몇 번 안 되는 자각의 계기가 됐다.

우리가 위아 같은 문화적 열등감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우리가 서양 문명을 따라잡고 극복함으로써 진정한 자부심을 갖게 되기까지는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 콤플렉스로부터의 해방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받아들이고 긍정하며 사랑할 수 있을 때, 즉 우리 스스로 정신적 자존감을 회복할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외국에서 들어온 수입 학문이 그 한계를 넘어 하나의 독창적인 학문으로서 금자탑을 쌓은 전력이 우리에게는 있다. 성리학은 고려 말에 들어온 수입 학문이었지만, 약 이백 년 후 조선의 退溪와 栗谷에 이르러 꽃을 피웠으며, 그 수준은 지금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수입 학문으로 시작한 조선 성리학이 어떻게 나름의 독창성을 지닌 세계적 학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한 동료 언어학자의 말에 따르면, 여기에는 중국과 언어구조가 전혀 다른 우리말식의 사고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는 퇴계와 율곡한테 배운 제자들의 노트에서도 드러나는데, 그들이 공부했던 경전의 여백에는 스승의 설명이 여기저기 한글로 적혀 있다는 것이다. 수입 학문을 우리말과 우리식 사고방식으로 소화해 축적한 지 이백 년이 흘러 드디어 나름의 체계와 깊이를 지닌 독창적 학문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철학은 언제쯤 이런 수준에 다다를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이 비단 서양철학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동양철학과 한국철학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는 國漢文을 혼용했다. 대부분의 간판은 漢字였고 신문기사의 주요 단어도 한자였다. 지금의 한글 전용 세대는 자기 조상들의 문집도 편지글도 읽지 못한다. 하물며 退栗의 저술 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요즘 많이 번역됐다고는 해도 한자를 체득해 常用하던 세대의 감각이나 이해 수준을 따라갈 수는 없다. 우리와 달리 영국 학생들은 셰익스피어가 쓴 작품을 원문 그대로 읽는다. 일본 학생도 ‘가나’로 쓰인 이전 세대의 작품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반면에 한글을 전용하는 우리의 현대문화는 한자를 상용하던 전통문화와 단절됐다. 현재 대대적인 번역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모든 주요 서적이나 문서가 번역되기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세월이 걸릴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서양철학도 전통 철학도 외국어나 한문을 따로 공부해 접근하거나 번역서를 통해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철학 공부는 모국어로 사고하는 사람들의 공부나 이미 ‘物理가 난’ 사람들의 공부와 아무래도 차이가 나기 쉽다. 모든 철학이 당대의 절실한 문제의식의 산물임을 생각할 때, 늘 수입 학문으로서 번역을 통해 접근해야 하는 철학 공부란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一流가 아닌 二流 철학, 이것이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의 현대 철학이 퇴계, 율곡, 다산의 수준에 이르려면 우리 한글세대의 번역 문화가 곰삭아 우리의 실존적인 문제의식을 우리 자신들의 언어로 담아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는 족히 한 세기는 걸릴 것이다. 어떤 외래 사상이나 어떤 전통 사상도 현재 우리의 관심사와 사고방식, 현재 우리의 언어 감각과 느낌에 의해 재해석돼 우리 자신의 실존적 이야기로 풀어내지 않는 한, 그것은 ‘이류 철학’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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