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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시대의 생명윤리
전환시대의 생명윤리
  • 안길찬 기자
  • 승인 2001.01.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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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서울대 교수 vs. 김형철 연세대 교수
생명과학이 질주하고 있다.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이후 생명과학은 가파른 성장의 길을 달려왔다. 70년대에는 유전공학을 내놓더니, 21세기 접어들어서는 복제기술까지 낳았다. 그러나 생명과학의 질주를 바라보는 종교·철학계의 시선은 갈수록 ‘고삐 풀린 망아지’를 보는 듯하다. 인간성 상실을 가져올 기술발전에 대한 우려에서다.

우리나라에서도 생명과학안전윤리에 관한 법률 제정작업이 본격화되면서 생명윤리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논쟁은 치열하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12월, 발표한 ‘생명과학보건안전윤리법’ 시안을 둘러싼 공방은 대표적이다. 시민단체와 종교·철학계의 환영의사에 반해 생명과학계는 “생명과학 연구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생명과학의 발전과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바탕을 둔 생명윤리의 문제는 바야흐로 합의된 사회적 가이드 라인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호 네 번째 기획좌담의 주제는 ‘전환시대의 생명윤리’로 세워 보았다. 워낙 양측의 견해차가 뚜렷하다는 점에서 대담자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로 모셨다. 진화생물학자인 최재천 서울대 교수와 공리적 윤리학자인 김형철 연세대 교수가 그들이다.

●일시 : 1월 5일 오후 3시
●장소 : 교수신문사 회의실
●진행·정리 : 안길찬 기자

최재천
1954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77년 서울대 동물학과를 졸업했다. 90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행동생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90~92년 미국 하버드대학과 미시건 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94년부터 서울대 자연과학대 생명과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현재 국제학술지 Journal of Insect Behavior의 편집위원과 Journal of Ethology 편집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곤충과 거미류의 사회행동의 진화』(1997), 『개미제국의 발견』(1999), 『보전생물학』(2000)등이 있다.

김형철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78년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88년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난 91년부터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철학연구소장, 교무부차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연세대 사이버교육지원센터장을 맡고 있다. 한국철학회 생명윤리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 『자유론』(1992), 『합의도덕론』(1993), 『환경윤리학』(1994), 『한국사회의 도덕개혁』(1996) 등이 있다.

애초부터 치열한 논쟁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대담자는 오히려 죽이 맞았다. 치열한 논쟁을 기대했다면 이번 대담은 실패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개체 복제와, 배아복제, 유전자 조작 등 생명과학에 대한 문제는 명확한 답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논쟁보다는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 더욱 생산적이다. 대담자를 진화생물학자이면서 철학적 사유에 해박한 최재천 교수와, 윤리학자이면서 생명과학에 이해가 깊은 김형철 교수로 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양자간의 차이를 이해하고 합의점을 도출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리라.

사회 : 철학적 생명관과 진화론에 근거한 과학적 생명관은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각자가 생각하시는 생명의 문제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합니다.

김형철(이하 김) : 제일 답변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동료 철학자에게 질타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생명현상에 대해 규정을 내리는 것은 과학자의 몫이라고 봅니다. 반면 철학자의 역할은 생명의 의미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의미 있는 삶이고 보호되어야 할 생명인가하는 생명가치의 문제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역할분담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죠. 윤리학에서 경계하는 생명경시풍조는 생명현상을 무엇으로 보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적인 의미의 생명을 너무 쉽게 소모한다는 데 있습니다.

최재천(이하 최) : 반대로 진화론이 생명의 의미까지 규정을 하려는 것이 서로의 자리를 비좁게 만들겠네요. 현대 진화생물학에서 개체는 생명의 주체가 아니라 유전자가 만들어내 잠시 세상에 왔다가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보지요. 그렇게 보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영원한 실체는 유전자니까 생명의 고귀함 내지 존엄성은 심하게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유전자적 관점으로 삶을 규정하다 보면 산다는 것의 의미가 상당히 허무해지니까요. 생물학자들이 생명을 유전자를 전파하는 행위라고 정의하다보니 서로 불편한 점이 생기는 것 같네요.

인간생명이란 무엇인가

김 : 최 교수님도 유전자 결정론을 믿으십니까?

최 : 그것은 약간 문제가 있는 질문입니다. 유전자결정론이 잘못 전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전자결정론은 유전자가 모든 행위를 결정한다는 뜻의 결정론이 아닙니다. 없던 형질이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 결정론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유전자를 지닌 일란성 쌍둥이가 엄연히 다른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면 또한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보기도 힘들지요.

김 : 인간생명을 해석할 때는 유전자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문화를 가진 존재라는 점을 덧붙여야 합니다. 일란성 쌍둥이를 다른 인격체로 대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요. 인간생명에는 유전자로 환원되지 않는 인격과 문화가 존재하고 그것이 합쳐져서 인간의 인간다움을 만들어낸다는 데 동의하면 쉽게 허무감을 느낄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굳이 인간을 유기질이라고 폄하할 필요도 없죠.

최 : 거기에 동의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사실 동의는 못합니다. 유전자가 인간생명의 일거수 일투족을 결정하지는 않아도 사실 유전자가 가능한 문화의 범주도 그어놓는 것이거든요. 인간만큼 신경계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에 나오는 생명체도 없습니다. 침팬지는 태어난지 3개월이면 뛰어다니지만, 인간은 몸을 뒤집는 정도밖에 못하거든요. 생후 2~3년이 지나 신경세포가 짝을 짓고 회로망을 만들면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개체로 발달해 갑니다. 그러나 인간이 새가 될 수 없고, 호랑이가 될 수 없듯이 배울 수 있는 영역도 유전자가 테두리를 만들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간의 문화도 유전자의 결과물이라는 성격을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김 : 그때 ‘결정’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습니다. 인간에 대해 총체적 설명을 할 때 생물학적으로 유전자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가를 알아내는 것 보다, 관상쟁이의 일별이 더 정확하거나 의미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회 : 이렇듯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서지 않은 상태에서 생명과학이 질주하고 있습니다. 생명과학기술이 인간 복지에 근본적인 혜택을 줄 것인지, 열어서는 안될 판도라의 상자…

최 : 판도라의 상자가 있는데 안 열어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그 상자는 열리게 돼 있고 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 상자를 열어서 큰일이 생길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분명 열 것입니다. 호기심은 ‘고양이’가 아니라 ‘인간’을 죽이지요. 그것을 막는다는 것은 공허한 얘기입니다. 생명과학의 긍정성은 어떤 과학기술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큽니다. 저로서는 수명연장이 별로 탐탁치 않지만, 수명연장에 기여할 것은 당연합니다. 식량문제 해결에도 열쇠를 제공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방법상의 규제는 어떤 형태로든 필요하다는데는 동의합니다. 문제는 백가지가 긍정적이라도 한가지 부작용이 너무 클지도 모른다는 데 있으니까요.

김 : 인간은 이중성을 띠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자신이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는데 유전자 치료로 소생이 가능하다면 누가 생명과학기술에 기대지 않겠습니까. 다른 한편 인간은 현대 과학기술에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불확실성, 불완전성, 복잡성 때문이지요. 저는 어떤 과학자가 불순한 목적으로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폐단은 적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아주 좋은 의도로 진행한 연구가 그릇된 결과를 낳아 수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큽니다. 무엇보다 가장 현실적인 우려는 과학자들이 집단적으로 위험관리를 해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윤리적 의식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최 : 최근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죠. 첫째 아이가 병에 걸렸는데, 유전자 조작기법을 이용해서 둘째를 만들어 그 골수로 첫째 아이를 살렸습니다. 만약 제가 그런 상황에 닥친다면 감옥에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똑같이 할 겁니다. 그것을 안 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과학기술은 이미 존재하는데, 이를 이용하지 말라고 할 순 없죠. 문제는 생물학계 바깥에 있는 분들이 너무 성급한 반응을 보이는 데 있습니다. 인간게놈지도가 완성됐다 해도 이제 겨우 자리만 찾은 것일 뿐입니다. 본격적인 결과가 나오려면 빨라도 몇 십 년은 더 걸립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연구를 제한한다면 빛도 못보고 연구를 중단해야 하는 사태가 빚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과학자들이 스스로 윤리적 문제를 인식하고 자제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사회 : 과학이 자연의 원리를 밝혀내 인간복지 생활에 기여한 점은 인정되지만, 도구적 이성에 매몰돼 자연적인 원리를 거스르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습니다. 생명과학기술에 우려의 시선을 뗄 수 없는 것도 이 같은 이유입니다만.

최 : 분명 우려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생명과학 연구의 위험성은 유전자 치환을 통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다 알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사실 연구는 모든 유전자의 기능을 밝혀놓고 해야 하지만 그냥 치환해 보고 시도해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자들은 속도를 늦추면서 내부 규범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외부에서도 이점은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유전자를 기능을 파악하고 시작하기 위해 몇 십 년, 몇 백 년을 기다릴 수 없다는 점입니다. 현재 게놈연구는 웬만한 동식물의 중요한 종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이미 다른 나라에 다 빼앗기고 남은 게 별로 없습니다.

사회 : 생명과학 기술이 인간의 복지향상에 기여할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무턱대고 생명과학의 연구를 반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까.

김 : 동일한 두 인격체를 만들어낸다는 이유로 인간복제 연구를 반대하는 사람은 유치한 수준의 유전자결정론자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교집단 교주가 자신을 복제한 5천명의 어린이를 만들었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가 발생하는 것에 대해 과학자는 대책이 있을까요. 과학자간에 자율적인 규제가 행해지지 않으니까 일반인들과 가치·윤리학자들이 우려하는 것입니다.

생명과학 연구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사회 : 인간배아 복제 허용 여부입니다. 이는 결국 생명의 시작을 어디로 볼 것인가와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최 : 그것은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억지로 답을 써내라고 한다면 생명은 태어날 때 시작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언젠가 미국에서 남에게 아이를 입양시켰다가 자식을 찾겠다는 소송이 빚어진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낳아준 부모에게 되돌아갔지요. 당시 매스컴은 ‘생물학적 부모’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부적절합니다. 유전적 부모지, 생물학적 부모는 아니지요. 생물학은 유전학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학, 환경학을 포함한 학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정자난자가 만났을 때를 생명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따릅니다. 한 개체가 환경의 영향을 받고 만들어진 때라야 생명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김 : 인격체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태어나서부터라고 말할 수 있지만, 태아도 생명체로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 : 물론 그렇죠. 제 생각은 인간의 경우 생명체는 인격체로 보고 논의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배아복제를 허용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정한 규제범위는 필요하지만 이를 근원적으로 차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실질적인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점도 있습니다. 통제한다 해도 누군가는 할 것입니다. 원천 봉쇄는 의미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허용하되 어느 수준에서 허용할 지를 논의하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김 : 저는 윤리학에서도 공리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철학자들과는 약간 생각을 달리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4일 이전에 인간배아를 연구하는 것은 생명경시풍조를 가시적으로 불러일으키지 않고, 연구에 따른 혜택이 따르기 때문에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좀더 확실한 가시적 혜택이 증명돼야 하고, 과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해야 할 이유를 일반인들과 윤리학자에게 충분히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 : 유전자 정보의 조작과 치료도 논란거리입니다. 이를 이용한 생명과학 기술은 근대 의학이 보여준 성과를 뛰어넘는 획기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지만, 인간 프라이버시의 침해나 우생학적 유전자 차별 등의 우려를 낳고 있기도 합니다.

최 : 그 점에서 보면 복제는 별 볼 일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하게된다 해도 정작 결과를 보면 시들해질 것 같습니다. 정말로 큰 문제는 유전자 조작입니다. 이야말로 오·남용될 가능성이 엄청나게 큰 거죠. 가진 자의 손에서 놀아날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우리가 지금 걱정해야 할 것은 미국이 이에 대한 모든 것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제양 돌리도 개발은 영국이 했지만, 그 권리는 미국이 사버렸습니다. 막상 모든 기술이 미국에 수렴되면 이 분야에서 세계는 미국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은 확보한 기술을 바탕으로 자국민을 유전적으로 개량하면서 발전하는데, 다른 나라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치 못하다면 엄청난 불평등의 세계가 올 수도 있습니다.

김 : 옳은 지적입니다. 상업적 이익과 결탁된 생명과학은 두 가지 이유에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첫째는, 생명을 담보로 한 상업적 특허는 불평등과 권력집중화를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이를 발명으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물학 연구는 최초의 발견이지 분명 발명은 아닙니다. 특허를 냈다해서 남의 연구를 못하게 하고, 로열티를 내라고 하는 것은 에베레스트에 먼저 올랐다고 통행료를 내라는 것과 똑같죠. 생명과학기술과 관련된 특허는 다른 특허와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계적 차원에서 배타적 독점 이윤을 확보해주는 특허행위는 부적절합니다.

최 :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들끼리만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인문사회학자들이 규제를 하는 쪽에 서서 목을 죌 것이 아니라 함께 공동연구를 해야 합니다. 과학자 일부는 인문사회학자와 함께 지적하신 문제의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보면 솔직히 우리나라 생명과학 연구는 다른 국가를 따라가기 힘들 정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과학자들은 답답해 미치는 거죠. 들고뛰어도 못 쫓아가는 판에 왜 자꾸 발목을 잡느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진국의 횡포를 막아내는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몫을 찾아내는 길입니다.

김 :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의 특허시스템이 생명체를 담보로 한 선진국의 횡포임을 밝히고 국제적 공동연구의 필요성을 제안하는 전향적인 자세 전환이 필요합니다. 생명관련 기술은 공유돼야 하고 그것을 독점하려는 자의 저의가 인류평화를 위한 것이 아님을 고발해야 합니다. 국내에서도 공동연구를 통해 상업과의 결탁을 방지하면서 바람직한 모델을 국제사회에 제시해야 합니다.

전환시대 생명윤리, 어떻게 변모돼야 하나

사회 : 생명과학 연구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학자들의 윤리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인데요.

최 : 사실 그것이 모든 과학자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긍정적 성과를 내놓고도 몇몇 위험한 사건들 때문에 과학자의 위상이 너무나 심하게 손상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도 이제 전인격적 교육을 통해 인문사회학적,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문교육을 활성화하는 등 자기 규율을 만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규제를 덜 받기 위한 과학계 내부의 노력일 수 있습니다.

김 : 일반인들의 가장 큰 우려는 오·남용에 있으므로 자체 노력을 통해 신뢰를 획득해야 합니다. 과학자는 비밀보안만이 최고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좀더 개방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생명과학계 내에서 비윤리적 연구를 방지하기 위한 규정을 만들고, 자발적인 규제의지를 보여준다면 일반인들의 인식도 상당부분 바뀔 것입니다.

최 : 과학계내의 걱정은 지나친 규제가 가해지지 않을까 하는 데 있습니다. 대부분의 OECD 국가는 생태학자가 척추동물에 대해 진행하는 실험에도 엄청난 규제를 가합니다. 새 한 마리를 실험에 사용하려 해도 연구계획서보다 더 많은 내용의 승인서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를 피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연구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그렇게 강하게 규제를 할 때는 아니라고 봅니다. 과학자들이 스스로 할 수 있게 시간적 여유를 주고 숨통을 틔워줬으면 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심한 족쇄를 채워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사회 : 두분 말씀을 되짚어 보면 과학계와 철학계가 한발짝씩 물러서 생명과학 기술의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데서 의견이 일치됩니다. 그렇다면 전환시대의 생명윤리는 어떻게 만들어가야 합니까.

최 : 진화생물학은 윤리도 진화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윤리도 사회와 함께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윤리적 가치를 만들어야겠지요. 과학자들이 윤리 문제에도 자꾸 끼여들어야 하는 것은 과학자들이 새로운 윤리를 세우는데 자료를 제공할 임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김 :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을 수직적 상하로 서열을 매기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부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문화적인 것을 관용하고 수용할수록 튼튼한 사회가 됩니다. 이거 아니면 안된다는 폐쇄되고 경직된 체제는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겠지요.

최 : 다양성이 바로 진화의 밑거름입니다. 다양하지 않은 집단은 성공할 수 없으며 다양성을 줄이면 자멸할 가능성은 그만큼 커집니다.

● 인문학계에 바란다: 최재천 교수

과학자가
변할 수 있는
여유 고려해야
과학자에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라고 강요해선 안된다. 과학연구를 원천적으로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열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는 분명 열게 돼 있다. 열되 같이 힘을 합해 열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시작부터 열지 말라는 것은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니다. 문제는 부정적인 결과를 방지할 수 있는 ‘가이드 라인’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걱정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우리 밖에 있다.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들의 생명과학 기술의 독점이 더욱 큰 문제이다.
물론 생명과학의 자기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좀 여유있게 바라봐 주는 밖의 시각도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학문은 적이 아니기 때문에 불신을 기본으로 해서는 안된다. 한쪽에선 족쇄를 채우려 하고, 한쪽에선 안 들어가려고 발버둥쳐서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고 더욱 시급한 문제가 적지 않다. 함께 연구하고 협력하는 방향을 모색했으면 한다. 이를 위해선 과학자 스스로가 변해야 하고, 과학자가 변할 수 있는 여유공간과 시간이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

● 과학계에 바란다:김형철 교수

과학계내의
자율규제
선행돼야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생명과학이 상업적 이익에 매몰돼서는 안된다. 생명과학은 바로 같은 동료인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 스스로가 위험성을 직시하고 시작부터 지키는 윤리적 자기규범이 필요하다. 문제는 오·남용에 있다. 이에 대한 대비책 마련도 결국 과학자의 몫이다. 또한 과학자는 연구자인 동시에 책임 있는 시민의 입장에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과학기술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와 중요성을 과학자들이 먼저 인식해야 한다. 또 과학자는 자기가 제공하는 기술의 인간적 사회적 의미에 대해 사용자에게 경고할 수 있어야 한다. 특허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 생명과학기술은 발견이지 발명이 아니다. 연구업적이 있을 때는 개인의 공로가 인정되는 수준에서 보상받고, 그 성과는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전문가 집단의 윤리는 철두철미한 자율규제이어야 한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알지도 못하면서 망가뜨리는 일이 발생한다. 자체 내의 정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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