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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드로 다 빈치는 왜 '최후의 만찬'으로 물고기를 그렸을까?
레오나드로 다 빈치는 왜 '최후의 만찬'으로 물고기를 그렸을까?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7.07.1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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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음식-음식의 문화사_ 6. 최후의 만찬(1): 인간과 신의 하나 됨, 성체 성사
▲ 피렌체 근교 빈치 마을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가 그린 「최후의 만찬」. 여기에는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인간인 이상 ‘마지막 식사’를 해야 할 순간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 이후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정자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자, 이 잔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잘 들어라. 이제부터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는 포도로 빚은 것을 나는 결코 마시지 않겠다.’ 하시고는, 또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음식을 나눈 뒤에 또 그와 같이 잔을 들어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하셨다.” (루카 복음서 22장 17-20절, 공동번역성서)

밀라노에 갔다. 피렌체 근교 빈치(Vinci)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레 오나르도(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명작 「최후의 만찬」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은혜로운 성모 마리아’라는 뜻의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에(Santa Maria della Grazie) 성당 주방 벽에 예수와 열 두 제자가 함께 하는 마지막 식사 자리를 묘사한 최후의 만찬이 그려져 있다.

나는 이 그림의 실물을 보기 전 두 가지 큰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식탁에 앉아 있는 예수 오른쪽(화가에 따라 왼쪽이기도 하다) 자리에 있는 젊은 여인 또는 남자가 누구인가?’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식단이 과연 물고기 요리이며, 그렇다면 거기에는 무슨 까닭이 있지 않을까?’라는 점이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최후의 만찬」 속에 등장하는 젊은 여인 내지 요한이라고 의심되는 남자, 그리고 음식에 대해서 궁금해 오던 터였다. 십수년전 요르단을 거쳐 시리아에 갔을 때다. 수도인 다마섹(Damascus에 대한 우리나라 구약성경의 표기)을 둘러보고 북동방향으로 56km 떨어진 곳, 해발 1천500m 산기슭에 위치한 말룰라(Maaloula)라는 아람어(Aramaic)를 상용하는 마을을 방문했다. Maaloula라는 마을 이름은 ‘입구(entrance)’라는 뜻의 아람어 maëlã에서 왔다. 주민들의 종교는 시리아 정교회. 여기 마르 사르끼스(Deir Mar Sarkis)라는 가톨릭 수도원과 마르 테클라(Deir Mar Thecla)라는 이름의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이 있다.

현재 서부 新 아람어(Western Neo-Aramaic)를 사용하는 마을이 세 곳 있는데, 나머지 두 곳은 인근의 주바딘(Jubb'adin)과 알 사르카(Al-Sarkha 혹은 Bakhah) 마을이다. 이 마을들은 인류언어학적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곳으로, 아람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에 따르면 예수 생존 당시 중동의 공용어가 아람어였고, 예수도 서부 아람어 방언,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다 팔레스틴 아람어의 갈릴리 방언(the Galilean variety of Jewish Palestinian Aramaic)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말하던 아람어가 오늘날 시리아 마을에 남아있는 아람어와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2천년 세월동안 크고 작은 언어변화가 계속해서 수도 없이 있었으므로.

이 대목에서 「최후의 만찬」을 위해 인문학적 상상력, 근거 없는 상상이나 환상이 아닌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두되 그 이상의 것을 꿰뚫어보는 지적 통찰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인문학은 사람의 삶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에 대한 단순한 관찰 이상의 시선, 인문학적 시력을 길러주는 것이 인문학의 역할이다. 인문학적 시력으로 우리는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존재하는 것, 눈높이의 것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더 높고 멀리 있는 것,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봐야 한다. 그런 시선을 가질 때, 그런 눈맞춤이 가능할 때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인문학적 시선을 통한 혹은 매개로 한 인문학적 통찰력을 구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인문학적 통찰력이 발휘될 때 마침내 사람의 삶은 개선되거나 보다 행복해진다.

인문의 눈으로 예수의 삶과 최후의 만찬 엿보기

이런 관점에서, 인문에 바탕을 둔 통찰력으로 예수의 삶과 최후의 만찬을 바라보자. 늙은 요셉과 어린 마리아를 부모로 하여 태어난 나사렛 출신의 예수는 아람어의 갈릴리 방언을 구사했다. 언어는 사람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라틴어 사용자와 아람어 사용자는 사고와 인식 능력에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는 종족적으로는, 달리 말해 사회문화적으로는 유대인이었다. 모세처럼 시리아 광야 즉 사막에 들어가 고행도 했다. 잃어버린 6년간의 행방불명 시기도 있다. 긴 세월 어디에 가서 무엇을 했던 것일까? 분명한 것은 홀연히 나타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사업을 시작한 청년 예수가 봉착한 것이 넘을 수 없는 구습과 기득권 세력. 정의를 부르짖었지만, 정의란 항상 힘 가진 자에 의해 자의적으로 규정되고 집행되는 것이다. 당시의 권력은 로마와 유대교 랍비에게 있었다. 사랑을 설파했지만, 사람들은 자신만을 사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열렬했던 추종세력 특히 제자 일부는 비겁하게도 자신을 외면했고, 또 누구는 돈을 받고 자신을 팔아넘겼다.

▲ ‘최후의 만찬(Ultima Cena)’은 여러 화가들에게 소재가 됐다. Jaume Huquet(1412~1492)의 작품에는 ‘정체불명의 짐승 요리’가 접시에 담겨 있다.

이 정도의 事實로서의 기본 지식을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통찰력을 발휘한다면 인문을 포함한 학문의 본질이 유연성(flexibility)에 있음을 알게 되리라 믿는다. 편파주의, 독단주의, 학문의 발목잡기는 인문학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열린 마음으로 지금을 초월한 미래를 바라보는 인문학적 시선 내지 마음가짐을 예수는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낯선 곳을 여행하려면 언어학적 지식이 참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말룰라 마을에 있는 마라 사르끼스 수도원은 로마군단에 속한 시리아인 병사로서 전투에 임해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로마의 신을 섬김으로써 충성심을 보이라는 황제의 요청을 거부했다가 고문당하고 마침내 처형당한(303년 경) 로마병사 세르기우스(Saint Sergius)와 박쿠스(Saint Bacchus)를 기리는 곳이다. 수도원 명칭 Mar Sarkis에서 Sarkis는 Sergius의 앗시리아식 이름이며, 이름 앞에 붙은 Mar가 ‘성인(saint)’을 뜻하는 고대 아람어다. 바로 이 점이 이 수도원의 역사를 알게 하는 단서가 된다. 이 수도원에 아주 오래된 아이콘(icon)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최초로 주목한 「최후의 만찬」이다.

내가 34년 째 몸담고 있는 대학은 현재 가톨릭 재단에 속한다. 전과 달라진 풍경 중의 하나가 이따금 성직복을 입은 수녀와 신부가 교정을 오간다는 것이다. 가톨릭 성직자인 神父들은 그리스도의 新婦로서 미사를 집전하고 성체성사를 거행한다. 세례와 더불어 가톨릭 일곱 성사 중 하나인 성체성사는 내게 무엇보다 신비롭다. 가톨릭 의식에서 세례는 영세라고 번역돼 쓰이는데, 이는 육신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죄를 씻는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참고; 가톨릭 7대 성사?세례·견진·성체·고백·병자·신품·혼인 성사).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세례 요한이 마음에 든다.

“회개하라. 그 분이 오실 것이다.” 연일 이렇게 외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행하던 세례자 요한은 모욕감으로 원한을 품은 살로메의 소원대로 목이 잘려 쟁반에 담겨져 살로메 모녀와 의붓아버지 헤롯 (안티파스)왕의 조롱거리가 된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의 사연은 이렇다. 요부의 대명사 살로메는 신념에 찬데다 잘 생기까지 한 요한에게 반해서 추파를 던졌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자존심이 상한 살로메는 이 사실을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털어놓고 의붓아버지인 헤롯의 생일날 그의 앞에서 춤을 추고, 그 교태에 미혹된 왕이 상을 줄테니 원하는 바를 말하라 하자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여 요한을 죽게 만들었다. 유대의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7?∼100?)의 『유대 古事記』에 기록된 내용이다. 물론 마태복음 등 성경에도 이 이야기가 나온다.

유대 분봉왕인 헤롯 1세가 죽고 아들들이 영토를 나눠 통치하게 됐는데 헤롯은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이었다. 헤롯은 이복동생 빌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눈이 맞아 20년 넘게 함께 산 부인(나바테안 왕 아레타스의 딸)을 버린다. 세례 요한은 헤롯이 형제의 아내를 가로챈 것과 악한 일을 행한 것을 두고 책망했다. 요한을 의인이라 여기고 두려워했기에 얼마동안은 그의 책망을 감수하던 헤롯이었으나, 좋은 말도 자꾸 들으면 싫증이 나는 판에 헤롯과 헤로디아는 요한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감옥에 가뒀다.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과 더불어 잔치를 하였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다. 왕이 기분이 좋아져서 그 딸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하였다. 살로메가 어머니에게 가서 물어본 후,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그녀에게 주기를 구하였다. 헤롯이 심히 근심하였으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잔치에 앉은 자들로 인하여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령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딸에게 주었다. 살로메는 그것을 헤로디아에게 주었다.”(막 6:17-28).

세례 요한, 살로메, 그리고 끝없는 정욕

살로메는 요부에 변덕스런 사이코패스였다. 그녀의 어머니 헤로디아는 어떤 여자였을까? 그녀 내면의 무엇이 그녀를 뒤틀린 존재로 만들었을까? 그녀는 자신에 대한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원한을 품는 여자였다. 옳고 그르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 다른 이들은 침묵해야 했다. 그런 이상 심리의 그녀가 남편을 버리고 그의 이복형인 헤롯과 결혼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진정한 사랑을 추구해서 일까? 그보다 그녀는 사랑의 공허함 또는 부재를 비틀린 욕망으로 채우고자 했다.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잠 27:20) 결국 그녀는 끝없는 권력욕과 정욕에 눈이 멀어 인륜과 도덕을 파괴하는 악의 화신이 된다.
 

▲ 고대 아람어

페레 가르시아(Pere Garcia de Benavarri, 1445~1485)라는 화가가 이 일을 두고 「헤롯왕의 연회(Banquet d’Herodes)」(1470)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현재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카탈루냐 국립미술관에 페레 세라(Pere Serra, 1363~1375)의 「성모 제단화(Altarpiece of the Virgin)」와 나란히 걸려있다.
 
성체성사는 신과 인간의 친교(communion), 낮은 곳의 인간이 높은 곳의 신과 하나 되는 거룩한 의식이다. 그런데 가톨릭 신도로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는 행위의 근저에는 인간의 어떤 욕망이 들어 있는 것일까? 혹 불순한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예수와 같은 영생이나 그의 죽음으로 위대한 속죄(the Great Redemption)가 이뤄져, 다른 말로 하면 代贖이 행해져, 더 이상 죽지 않아도 좋은 불멸의 삶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

오랜 시간에 걸쳐 사제, 수도사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예배 의식을 강화하는 것이다. 최대한 거룩하게, 복잡하게, 정교하게 만들어 의식의 집전자로서 자신들의 위상을 높인다. 의식이 거룩하면 거룩할수록 신도들은 성스런 법복을 입고, 거룩한 음성으로 신을 찬미하는 사제들을 우러러보게 된다. 그들 앞에서 자신들이 죄인이며 한없이 비천한 존재이며, 이에 반해 사제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적 권능을 지닌 신의 대리인임을 인정한다. 사제들이 고귀한 신분을 유지하는 방법은 대단히 절묘하다.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입니다)
 
사제들의 선창에 따라 진솔하게 고백하는 회개의 떨리는 목소리. 평신도들은 이렇게 지배된다. 그러하다. 신과 관련된 일에 평민, 평신도는 모르는 비밀이 늘 존재한다. 지배집단, 힘을 가진 세력에 의해 결정되고 움직이는 세상의 법칙 같은 비밀 코드가 사제관 속에, 교황청 내부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원치 않는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피렌체 인근 빈치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으나 ‘사자처럼 용맹스런 남자(Leonardo)’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과 관련해서 내가 궁금해 하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예수 오른쪽 혹은 왼편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 또는 여자가 누구일까 하는 점이고, 또 하나는 만찬 테이블에 오른 음식이 어떤 것들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사실 이 두 가지 질문은 간단한 것이 아니라서 긴 설명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다른 화가가 그린 「최후의 만찬」(Huget Jaume, 1470년 作) 테이블 중앙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 요리가 올라가 있다. 이 짐승은 무엇이며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또 무엇인가?

레오나르도의 그림 속 물고기 요리는 나름대로 이해가 된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시절 교인들은 카타콤베와 같은 지하무덤에서 만나 비밀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신분확인을 위해 물고기 상징을 이용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보여주듯 물고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친근한 요리였다. 그렇다고 매일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식단에 오르는 물고기와 기독교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교인들은 그리스어로 물고기를 뜻하는 ΙΧΘΥΣ(이크튀스)라는 말로서 자신이 기독교도임을 밝혔다. 다시 말해 흔히 ‘익투스’라고 발음하는 ΙΧΘΥΣ(이크튀스)는 그리스어로 ‘물고기’라는 뜻의 말인데, 이 말은 결국 독생자인 ‘예수(Ι) 그리스도(Χ) 하느님(Θ)의 아들(Υ) 구세주(Σ)’를 상징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죄를 강조하는 종교다. 인간은 원죄를 안고 태어난 존재다.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성령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왔다가 대속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제자들과의 마지막 저녁식사가 있고난 다음날,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금요일은 회개의 의미로 금식일이 됐다. 육류는 먹을 수 없었다. 대신 물고기는 허용됐다. 중세에 이르자 1년의 절반 이상이 금식일이 됐다. 금할수록 당기는 것이 인간의 식욕. 사람들은 물고기에 몰입했다. 가히 폭발적인 물고기 수요가 촉발됐다. 이 일이 음식사에 있어 혁명적인 일이 벌어지게 된 계기가 된다.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 · 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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