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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축적과 온축 없는 ‘선인세 경쟁’
문화의 축적과 온축 없는 ‘선인세 경쟁’
  •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 승인 2017.07.0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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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조만간 한국어 번역판이 발행되어 여름 독서시장을 달굴 것으로 보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원작 총 2권)가 발행되기 전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 2월 일본에서 원작이 발행될 당시 초판을 130만부나 찍었고 3일 만에 50만부 가까이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의 선인세는 20억원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지난 3월 말에는 국내 최대 문학 출판사에서 한국어 번역판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는데, 해당 출판사는 언론에 오르내리는 정도의 금액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액수인 것은 분명하다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대체로 10억원대의 계약으로 추정된다. 계약 금액은 계약서에서 비밀 엄수 조항이어서 현실적으로 정확한 선인세 액수를 알기는 어렵다.       

고가의 선인세 문제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先印稅란, 판매량에 비례해 작가에게 지불하는 인세(로열티)를 출판 계약 시점에 미리 지불하는 금액이다. 어차피 나중에 판매량에 따라 정산(정가×판매량×인세율로 계산)을 하므로 사전에 과도한 선인세를 지급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누구인가. 고정 독자가 수십만 명으로 알려진, 판매량이 보장된 보증수표 같은 작가다. 한국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함께 가장 많은 고정 독자층을 거느린 작가다. 책이 안 팔리는 불황기에 대형 출판사들이 출판 계약 경쟁을 피하지 않는 이유다. 외국 책의 번역서 저작권을 중개하는 업체에서는 계약금의 10퍼센트에 달하는 수수료를 높이기 위해 그러한 경쟁에 불을 붙이는 경향도 있다. 외국의 인기 작가가 자본주의 경쟁 논리로 높은 선인세를 챙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많은 책이 팔리면 그만큼 출판시장이 활성화되기 때문에 모두에게 좋은 것 아니냐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선인세가 계약금의 성격을 지닌다면 2억원, 아니 2천만원으로도 얼마든지 계약이 가능하다. 굳이 고가의 계약 경쟁으로 출판사들이 없는 살림을 축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상처럼 많이 팔리지 않았을 경우의 위험 부담도 크다. 과거 하루키의 소설 중에는 고가의 선인세를 주고 계약했지만 기대에 크게 못 미칠 만큼 안 팔린 사례도 있다. 20억원의 선인세라면 적어도 130만 부 이상 팔려야 손해를 보지 않을 금액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발행 부수의 절반 정도가 서점에서 반품됐다고 한다. 전작들에 비해 폭발적인 판매력이 지속되지 못했고, 베스트셀러 상위권에서 내려온 지도 오래다.

문제는 출판사의 손익만이 아니다. 강남의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전국 부동산 가격이 들썩거리듯이, 인기 없는 다른 외국 저자들의 선인세 금액까지 덩달아 올려놓는 바람에 불필요한 출혈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결국 출판사들에게는 자충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내 중견 작가들의 선인세 금액은 고작 몇 백만원에 머물러 있다. 외국 작가 작품에 과당 경쟁을 할 만한 여력이 있다면 국내 작가들에게 과감하게 투자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주문일 수 있다. 하지만 국제 출판시장에서 상종가를 올리는 하루키 같은 국내 작가가 나오기 위해서라도 대형 출판사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나아가 국내 작가의 소설을 읽으려는 독자들의 애정도 커졌으면 한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작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늘어날 것이고, 한국 문학의 세계 진출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특히 대형 출판사들일수록 저작권 수입에 투자하는 돈의 상당 부분을 국내 저자 개발에 투입하려는 자각과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 대기업들이 원천기술 수입상 역할을 하다가 기술력을 쌓고 완제품 수출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한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출판 저작권 수입(외국 번역서 발행) 비중은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수입 학문의 문제는 출판 분야와도 직결된다. 

번역출판은 번역가 등 인적 자원이 풍부한 한국 현실에서 새로운 도서의 기획출판에 비해 단기간에 적은 비용으로 출판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투자금의 회수 또한 빠르다. 그러나 그와 같이 문화적으로나 산업적으로 축적과 온축이 없는 상업 마인드만으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영원한 수입상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기 해외 작가를 둘러싼 출판사들의 선인세 경쟁은 사회적으로도 함께 생각해야 할 화두이기도 하다. 출판계가 앞장서서 나름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불필요한 경쟁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국내 저자에 대한 지원과 투자를 늘리고 독서시장 확대를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현재 연간 2천 건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출판 저작권의 수출도 좋은 작품만 있으면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 국내 출판 불황에 대한 일정한 타개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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