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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적 재검토 … 새로운 서사 기호학 모델 제시하기도
총체적 재검토 … 새로운 서사 기호학 모델 제시하기도
  • 김성도 고려대·언어학과
  • 승인 2017.06.22 2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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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마스 탄생 100주년 국제 학술대회를 마치고

초학제적 모험을 감수하려는 기호학의 야심찬 시도에 맞서 역풍과 저항이 있었으나 개별 기호학의 연구로 연구를 확장시키면서 그것들을 통해 횡단성의 구축을 추구한 그레마스 기호학의소명은 포기되지 않았다. 

 

현대 기호학의 양축 가운 데 하나인 구조 기호학의 창립자인 그레마스(Algirdas Greimas, 1917~1992년)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 학술대회가 프랑스 기호학회와 유네스코의 공동주관아래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5월 29일부터 6월 2일까지 개최됐다. ‘그레마스: 구조의 미래’라는 학술 대회 제목 아래 전 세계 30여국에서 약 300여명의 학자가 참석했으며 15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5월 29일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열린 ‘기호학자가 바라본 세계(Le monde vu par un s?mioticien)’는 그레마스의 삶을 다룬 전시회 개막식으로, 리투아니아 정부가 후원한 행사였으며, 이번 국제학술대회의 전야제였다. 

5월 30일 오전 개막식과 더불어 오전 세션에는 지난 4월 초 타계한 프랑스 언어학계의 거장인 미셀 아리베 교수에 대한 추모식이 있었다. 이어서 발표된 기조발제 논문, ‘그레마스와 현대 언어학’에서 생존해 있는 프랑스 언어학계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라스티에 교수는 그레마스가 어휘학자로부터 점차적으로 연구의 관심 단위를 확장해 담화와 문화 현상에 이르는 그의 인식론적 진화를 세밀하게 포착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4개의 기조발제, 10 개의 마스터 클래스를 비롯해 약 10여개의 분과들로 나뉘어 그레마스의 사상과 저술에 대해, 그것의 외연, 깊이, 현대적 적용범위와 영향력 등에 대한 총체적 검토를 수행한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번 학술대회는 크게 4개의 축을 설정하고 기획됐다. 첫 번째 축. 역사적 지속 속에 각인된 그레마스의 사상을 그것의 지적 유산, 영향과 변형 차원에서 역사적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검토작업이었다. 그레마스는 거의 예언적 비전의 과학적 기획을 제시했고 이것은 기호학이 20세기 중반기 이후의 과학적 패러다임들과 더불어 상호 작용하고 진화하면서 자신을 투사시키고 적응시킬 수 있도록 해주었다. 바로 이 같은 맥락에서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1960~70년대에 창발한 구조 기호학의 지적 기획의 전달과 현동화를 가능케 한 다양한 변형들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가 진행됐다.   

두 번째 축은 기호학이 다른 인접 분야들에 미친 영향과 외연의 문제다. 구조주의의 기원부터 인문사회과학의 목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의미 작용의 문제들의 횡단성과 초학제성을 선명하게 밝혀놓는 데 있었다는 점에서 기호학의 학술적 사명은 정당화될 수 있었다. 

이 같은 초학제적 모험을 감수하려는 기호학의 야심찬 시도에 맞서 역풍과 저항이 있었으나 개별 기호학의 연구로 연구를 확장시키면서 그것들을 통해 횡단성의 구축을 추구한 그레마스 기호학의 소명은 포기되지 않았다.

세 번째 축. 그레마스 기호학 이론과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축조된 다양한 기호학적 모델들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작업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그레마스로부터 영감을 받아 구축된 구조 기호학은 주로 연역에 기초한 다수의 이론적 모델들을 생성했으며 이 가운데는 긴장 기호학, 발화작용 기호학, 도상 기호학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런데 신경과학과 인지과학을 비롯해 상이한 인문사회과학에서 획득된 성과들에 힘입어 이들 기호학 모델들의 타당성을 증명 또는 반박하는 절차를 겨냥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네 번째 연구 축은 그레마스 기호학에 제기된 사회적 도전들로서, 기호학이 현대 세계에서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라는 현실적 문제를 설정했다. 특히 기호학이 정신과학과 문화과학에 속하지만, 현대 기호학의 외연은 사회적 사실들 전체를 아우름은 물론 그 너머의 자연 세계까지 넘보고 있다. 이점에서 기호학은 환경과 지속가능성 문제를 비롯해 교육권, 인권과 차별, 정보 접근, 보건, 에너지 등의 긴박한 글로벌 의제들과 현안들에 대해서 기호학적 통찰을 제시해야 할 시대적 의무를 의식하고 있다. 

그레마스가 미친 사상적 아우라와 영향력은 기조 발제를 맡은 전공자들의 면면에서 나타난다. 건축이론과 고대 도시의 공간 구조의 대가인 하마드 교수, 수학자 장 쁘띠토, 동양 지리학과 일본사상의 태두인 오귀스텡 베르크 등이 기조발제자로 나섰다. 특히 쁘티토 교수는 그레마스의 기호학 이론을 퍼스의 기호학 이론, 훗설과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 인지과학, 현대 미학, 현대 수학의 흐름과 상호 교차하면서 그레마스 기호학 이론의 인식론적 기초를 검토하는 난해한 작업을 명료하게 정리해 큰 호응을 얻었다. 그레마스 기호학 이론의 뿌리에서 그는 현대 음운론 모델, 토폴로지 이론과 수학적 긴장성의 개념을 포착할 수 있다고 진술했다. 특히, 그는 그레마스의 초기 저술인 『구조 의미론』에서 지각의 현상으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아 의미의 형식화 못지않게, 의미가 신체를 통해 체현되는 과정을 의미론의 중추적 요소로서 파악했음을 지적했다. 그레마스의 기호학 사상의 뿌리에 스며있는 현상학과 미학적 사고에 대해서는 거의 반세기 동안 기호학과 미학을 접목시켜온 철학자 파레트(Herman Parret) 교수의 기조발제에서도 계속해서 논의된 주제였다.  

이밖에도 세션 발표에서 그레마스의 기호학 이론이 요즘 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론이라 할 수 있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 Network Theory, 통상 ANT 약어를 사용)의 이론적 영감이었다는 점을 치밀하게 밝힌 이탈리아 학자의 논문도 큰 관심을 끌었다. 

또한 이란 기호학자 샤히리 교수는 페르시아 시인 루미의 잠언집에 착안해, ‘경각의 기호학’이라는 새로운 서사 기호학의 모델을 제시하는 독창적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레마스의 서사 기호학 모델에서 이른바 제재와 인정(sanction)은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행동이 완료된 이후에 이에 대한 상벌 차원에서 이뤄지는 선형성을 띠고 있는 반면, 전통적 서사에서는 행동이 이뤄지기 전에 그것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차원에서 미리 행동주체에게 일정한 신체적·정치적 신호를 보내 미리 상벌을 행사하는 비선형적인 서사 프로그램에 주목한 것이다. 그의 특강을 들으면서 필자는 이 같은 경각 또는 경계의 기호학(semiotics of alert)은 문학적 서사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보편적 현상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다양한 현상들에 적용될 수 있다는 기대를 해보았다. 예컨대, 재난 예보나 전쟁의 경고, 심지어 개인의 삶에서 건강 이상 신호 등도 모두 이 같은 새로운 기호학 모델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작금의 북한 핵무장 위협을 이 같은 경각의 서사기호학 모델에 적용해본다면 흥미로운 연구가 될 것이다. 

필자는 그레마스 기호학파에서 사회 기호학 분야의 거장인 란도프스키(Eric Landowski)가 주재하는 ‘상호작용’ 세션에서 「구조 기호학의 연구 프로그램으로서의 전염」을 발표했는데, 현대 기호학에서 언어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 현상들의 전염성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 같은 전염 기호학의 사상적 계보를, 타르드(Gabriel Tarde)의 전염 모델, 소쉬르의 지리 언어학과 인지언어학자 단 스페르버(Dan Sperber)의 표상의 전염 모델을 종합화하면서, 제시해 프랑스와 남미의 학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다. 

 

김성도 고려대·언어학과
필자는 파리10대학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 세계기호학회 부회장, 한국영상문화학회 회장으로 있다. 저역서로 『그라마톨로지』(역서), 『소쉬르의 마지막 강의』(역서), 『기호, 텍스트, 그리고 삶』,『도시인간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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