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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敎의 출현
데이터敎의 출현
  • 김정규 한국방송통신대 출판문화원·시인
  • 승인 2017.06.1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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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김정규 한국방송통신대 출판문화원·시인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벼슬길에 오를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위장전입, 탈세 등 범법행위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사로운 과거까지 SNS를 통해 낱낱이 공개되고 있는데, 이를 보고 있자면 衆人環視裡라는 말이 떠오른다. 여러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안을 구경한다는 뜻이다. 인터넷 시대의 도래로 우리는 수천, 수만 명이 사이버 공간에서 ‘환시리’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머지않아 고위공직에 나아가더라도 이런 수모를 겪을 필요가 없게 될 것 같다. 아니 고위공직자마저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사안에 대한 분석과 판단은 ‘데이터’를 통해 간단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김명주 역, 김영사)에서 ‘데이터敎’라는 새로운 종교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생명과학자들은 찰스 다윈 이후 150년 동안 연구하면서 유기체를 생화학적 알고리즘으로 보게 됐다. 컴퓨터 과학자들은 앨런 튜링 이후 80년 동안에 정교한 전자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데이터교는 이 둘이 합쳐지면서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동물과 기계의 장벽을 허물고, 결국에는 전자 알고리즘이 생화학적 알고리즘을 해독해 그것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유발 하라리는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모든 과학분과들을 통합하는 하나의 일반이론이 가능하게 된다. 데이터교에 따르면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증권거래소의 거품, 독감 바이러스는 데이터 흐름상 세 가지 패턴에 불과하므로 동일한 기본 개념과 도구를 이용해 분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과학자가 공용어로 소통하게 되는 것이고, 음악가와 경제학자, 세포생물학자는 마침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70년 전에 영국의 과학자 찰스 스노(C. P. Snow)가 『두 문화(The Two Cultures)』에서 통탄했던 그 학제간의 장벽이 제대로 허물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화폐, 제국, 보편적 종교가 등장하면서 기원전 1000년 이래로 지구 전체를 아우르는 단일한 네트워크를 의식적으로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꿈이 실현되기 시작했다. 근대 초기의 탐험가와 상인들이 가느다란 실들을 짰다면, 콜럼버스 시대에는 그것이 거미줄이 됐고 이제는 훨씬 복잡하고 견고해진 인터넷망이 됐다. 정보가 자유롭게 흐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데이터교도들은 인류가 결국에는 단일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인 ‘만물인터넷(Internet-of-All-Things)’이라 불리는 매우 효율적인 데이터 처리 시스템을 건설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자본주의가 그랬듯 데이터교도 처음에는 가치중립적인 ‘과학이론’으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옳고 그름을 결정할 권한을 주장하는 ‘종교’로 변하고 있다. 이 새로운 종교가 떠받드는 지고의 가치는 정보의 흐름이다. ‘생명’이 정보의 움직임이라면, 그리고 생명이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정보 흐름을 더 깊고 더 넓게 확장해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우주적 규모의 데이터 처리 시스템은 마치 神과 같을 것이다. 어디에나 존재하면서 모든 것을 통제할 것이고 보통의 인간들은 그 안으로 흡수될 것이다.

사람들이 데이터의 흐름 속에 합류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데이터 흐름의 일부일 때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종교들은 당신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우주적 규모의 장대한 계획의 일부이고, ‘신’은 매 순간 당신을 지켜보면서 당신의 생각과 감정에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이제 데이터교는 당신의 모든 말과 행동이 거대한 데이터 흐름의 일부이고 ‘알고리즘’은 항상 당신을 지켜보면서 당신이 행동하고 느끼는 모든 것에 신경 쓴다고 말한다. 진정한 신자들은 데이터 흐름과의 연결이 끊기는 것을 인생의 의미를 잃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 행동이나 경험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그것이 전 지구적 정보교류에 아무 기여도 하지 못한다면, 뭔가를 경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한다.

자, 이 정도 되면 초인류로 진화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절로 나온다. 그저 자신의 경험을 잘 기록하기 위해 글쓰기와 사진찍기 훈련이나 열심히 해야 하나? 생명공학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떨쳐 버리고, 뇌에 비유기체인 컴퓨터를 합성해서 사이보그가 돼야 하나? 만물인터넷과 절교하고 독립선언을 해야 하나?

우리는 과거에 인류를 괴롭히던 ‘기아, 역병, 전쟁’을 극복하고, 신의 영역이라 여기던 ‘불멸, 행복, 신성’의 영역으로 다가가고 있다. 그러나 그 물결이 너무 빠르고 거세어서 개인 차원에서 대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워 보인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진지하게 ‘그래서 무엇을 인간이라고 할 것인지, 어디까지 타협하고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지’ 種의 차원에서 논의해야 할 갈림길에 섰다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에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김정규 한국방송통신대 출판문화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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