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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위한 시간과 장미를 키워내는 시간
빵을 위한 시간과 장미를 키워내는 시간
  • 박혜영 인하대·영문학
  • 승인 2017.06.0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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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박혜영 인하대·영문학

영국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켄 로치(Ken Loach)의 「빵과 장미(Bread and Roses)」에는 일자리를 찾아 고향인 멕시코를 떠나 미국으로 밀입국한 어느 자매의 이야기가 나온다. 돈을 벌기위해 여동생인 마야는 ‘천사들의 도시’인 로스앤젤레스로 밀입국한 언니를 찾아오지만 그녀를 기다린 것은 천사가 아니라 불법 이민자들에게 가혹한 미국식 노동환경이었다. 엄격한 근무규정과 이를 어기면 가차 없이 삭감되는 성과급 임금제, 잠깐 동안의 휴식도 허용되지 않는 빡빡한 일정과 감시체제 속에서 불법이민자들은 오직 빵을 벌기위해 온갖 모욕을 참아내며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배고픈 이들에게 돈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활동가의 도움으로 동료들과 함께 파업을 이끈 마야는 사람답게 살기위해서는 빵뿐 아니라 장미도 필요하다고 외친다. 원래 이 제목은 미국시인인 제임스 오펜하임(James Oppenheim)의 시에서 따온 것이지만, ‘빵과 장미’는 1912년에 일어난 매사추세츠 주의 섬유공장파업에서 이민 온 여성노동자들이 내건 구호이기도 하다. 그들의 구호는 “우리에겐 빵뿐 아니라 장미도 필요하다(We want Bread, and Roses, too)”였다.

지난 정권부터 교육부는 학령인구 감소를 잣대삼아 대학구조조정을 밀어붙였고, 각 대학은 이에 화답하듯 실용성이 가장 떨어지는 학문부터 순서대로 없애고 있다. 시간이 흘러가면 일부 대학들과 학과들은 정원감축을 견디다 못해 떨어져나갈 것이고, 칼바람을 피한 다수의 대학들도 학과 통폐합을 비롯한 과감한 구조조정을 추진할 것이다.

물론 정원축소나 구조조정 그 자체가 염려스러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교육부나 대학이 추진하려는 개혁의 본질이 이와 같은 수량적 조정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개혁방향에는 학령인구 감소를 빌미로 대학의 성격을 보다 친기업적, 친자본적, 친실용적으로 바꾸려는 ‘빵의 논리’가 숨어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생존에는 반드시 빵이 필요하며, 그것이 일용할 양식이자 나아가 가족을 꾸리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물적 기반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켄 로치가 보여주듯이 가난한 노동자들도 빵만을 위해 파업을 하진 않았다. 이들이 장미를 요구한 것은 오직 생존만을 위한 삶이란 바로 푸코가 말한 ‘헐벗은 삶(bare life)’이며, 그런 삶의 방식이 대다수를 지배하게 될 때 예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향후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논리에 따라 구조조정과 학문간 통폐합이 이뤄진다면 대학은 학생들에게 오직 빵을 벌 방법만을 훈련시켜주는 취업기관이 될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장미를 키워낼 능력을 배울 수 없게 된다면 우리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경쟁에 토대를 둔 생존기술만을 배우고 공존을 위한 풍요로운 삶의 기술을 배울 수 없게 된다면 앞으로 우리사회는 더욱 살벌한 정글이 될 것이다.
 
삶이란 필요만 충족시키는 데 있지 않다. 온전한 삶을 위해서는 장미를 키워내는 시간도 반드시 필요하다. 무릇 대학의 공공성은 기업논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경제논리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것들의 필요성을 깊이 성찰하는 데 있다. 쓸모없는 것의 유용성과 쓸모 있는 것의 무용성이 함께 필요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노예나 아니면 로봇의 삶이 될 것이다. 막대한 자본과 놀라운 과학기술로 극도의 풍요와 안전을 이룩한 그야말로 신천지인 ‘멋진 신세계’가 왜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인지를 인식할 수 있을 때 장미의 시간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박혜영 인하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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