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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냄새 그 심층을 엿보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냄새 그 심층을 엿보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5.23 1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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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 『인물로 보는 해방정국의 풍경』 신복룡 지음, 지식산업사, 416쪽, 22,000원

건국대에서 오래 가르치다 퇴임한 신복룡 교수는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학자다.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건, 그가 左顧右眄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학문 스타일, 즉 역사에 많이 눈을 돌리는 정치학자라는 데서 연유한다.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자주 역사의 異說을 준거로 동원하는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최근에 그가 상재한 책 『인물로 보는 해방정국의 풍경』(지식산업사 刊)은 그런 그의 면모를 다시금 확인해준다. 

몇 해 전 <주간조선>에 일부 연재하다 회사의 색깔과 맞지 않아 연재 중단된 기획 원고를 살린 이 책 ‘글 머리에’에 그는 이렇게 썼다. “연재는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나는 좌우익 모두로부터 십자포화를 받았다. 우익들은 나를 빨갱이라고 몰아붙였고, 좌익들은 보수 신문에 기생한다고 댓글을 달았다. 결국 연재는 끝을 보지 못하고 17회로 마감했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연재였지만, 신 교수는 스스로 중단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 연재에 마침표를 찍었다. 책은 바로 그런 상처 위에서 자라 꽃처럼 피어난 결과물이다.

현대사의 깊은 이면 응시

신 교수는 잘 알려진 한국현대사 분야 정치학자다. 그런 그가 해방정국을 움직인 인물들을 어떻게 읽어냈는지 살펴보는 건, 한국현대사의 가장 역동적인 공간을 추적하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돌아보니 내가 한국현대사를 공부하고 강의한 지도 어언 40년이 흘러가고 있다. 나로서는 하고 싶었던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현대사의 이면에 들어갈수록 우리가 배운 것과 많이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촘스키가 개탄했듯이, ‘세상의 진실을 속속들이 알고 나면 우리는 늘 우울해진다.’ 그러나 그것을 덮어두는 것은 지식인의 도리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더욱이 미국연방문서보관소(NARA)에서 공부하면서 채록한 1만5천쪽의 자료를 읽고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됐다.”

사실 그는 한말의 정치(사상)사가 전공이었다. 東學과 전봉준의 일생을 파고들다가 미국 유학을 계기로 그의 視座가 현대사로 내려왔던 게 그의 전공 길을 바꿨다. 크로체가 “역사는 어차피 현대사다”라고 외쳤듯, 그 역시 ‘가까운 체험에 대한 회억’의 절실성, 한국현대사의 참혹성 때문에 눈길을 돌리게 됐다. 하지만, 그는 역사에서 시대정신을 중요하게 읽어내려는 여느 역사주의자들과 다른 접근을 했다. 그가 보기에 역사는 단순하고 우발적이며, 인간의 오욕칠정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그 무엇이다. 어쩌면 이런 시각이 그의 학문을 원근에서 조율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시각에서 제출된 책이 2001년에 내놓은 『한국분단사연구: 1943-1953』이다. 

저자 스스로 말하듯 이번에 내놓은 책은 이 2001년판 『한국분단사연구』를 저본으로 삼아 책 줄거리를 평이한 이야기 문체로 정리한 것이라 인용된 ‘통계’는 다소 뒤지지만, 다른 미덕이 있다. “이 책에서는 강단과 논문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던 ?史와 슬프고 아름답고 추악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 현실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이 때문에 이 책이 2001년판의 단순 ‘축약판’이 아님을 강조한다. 

책의 기조에는 행태주의(behavioralism)가 깔려 있다. 그의 말대로 해방정국을 살다간 사람들의 인성과 개인적 체험 또는 환경이 어떻게 역사를 編織해 갔는가를 살펴보는 데는 썩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인성, 개인적 체험, 환경과 같은 요소를 강조하기 때문에 이 책의 서술은 역사학의 주류 논쟁에서도 빗겨 서 있지만 그 대신 교과서나 연구서 또는 강의실에서 말할 수 없었던 해방정국을 살다간 이들의 ‘사람 냄새 나는 모습’이 진풍경처럼 그려질 수 있다. 

책은 ‘해방: 망국의 책임을 묻지 않는 역사’(제1장)부터 ‘무엇이 통일을 가로막는가?’(제28장)까지 모두 28장으로 구성됐지만, 저자가 던진 질문(우리에게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의 현재성이 고루 반영돼 있다. 그가 응시한 인물로는 송진우, 여운형, 김규식, 이승만, 김구, 백관수, 박헌영, 김일성, 맥아더, 마오쩌둥 등이 있지만, 그의 시선에는 신탁통치 파동, 미소공동위원회, 대구사건, 제주 4·3사건, 여수·순천사건, 한국전쟁, 휴전회담 등, 굵직한 이 시대의 사건들도 어김없이 놓여 있다. 2001년의 848쪽 책을 416쪽에 녹여낸 셈이다.

이 책을 읽어내기 전에 좀더 이해하고 가야할 부분이 있다. 역시 그의 학문적 캐릭터다.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내가 한국사를 쓰면서 늘 선학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른바 우리 학계에서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선행 연구’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그들의 연구가 대단치 않아서도 아니고, 그들의 연구에 동의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나는 다만 그들의 연구를 읽음으로써 나의 생각이 이미 유행되고 있는 기존의 논리대로 고착화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그의 표현으로 말하면, ‘몽환적 전제에 매몰되는 것이 싫었다’는 건데, 여기에는 영국의 역사학자 스트래치(Lytton Strachey)로부터 일정 영향 받은 바가 있다. “역사가의 첫 번째 필요조건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글을 시작하는 것이다.”(『빅토리아시대의 명사들』, 1918)라는 문장이 그에게 충격을 줬던 것 같다. 한국의 역사학을 가리켜 “베이컨이 말한 ‘동굴의 우상’에 갇혀 대롱을 통해 세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라고 말하는 그에게 스트래치의 저 명제는 그에게 ‘역사학의 우상파괴자’의 길을 가리켰으리라.  

"한국 분단은 內爭의 사생아"

명쾌하고 시원시원한 문장들로 가득한 이 책 어느 장에서나 해방정국을 살다간 그 시대 사람의 냄새가 가득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제27장 ‘통일 논의를 둘러싼 허구들’은 더더욱 독특하게 읽힌다. 한국 분단에 관한 신 교수의 독특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 그는 한국 분단이 미소 냉전체제의 산물, 국제질서에 의해 고착화된 결과물이라는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한국 분단은 內爭의 사생아였으며, 오랜 역사성을 지닌 역사의 비극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분단에 관한 논의는 역사주의를 소홀히 했다. 한국의 분단이 전적으로 냉전의 소산이었다면 냉전체제의 붕괴와 함께 한국의 분단도 극복됐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따라서 현대사의 연구자들은 한국분단사를 논의하면서 역사주의의 결핍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분단을 둘러싼 해답을 얻는 데 더 많은 어려움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분단과 한국전쟁, 분단 고착화에는 외세의 개입보다 우리의 책임이 크다. 그는 이것을 “이 나라 정치인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망국과 분단과 전쟁을 부른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의 이런 평가에 관련 학계가 물론 다 동의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외재적 원인만큼이나 내재적 원인 역시 무시할 수 없다는 이런 시각도 역사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알려줄 수 있다는 점에서 경청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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