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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평, 표현의 자유와 한계 사이에서
만평, 표현의 자유와 한계 사이에서
  •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 승인 2017.05.1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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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 박아르마 건양대 교수

2015년 1월 7일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알려진 쿠아시 형제가 프랑스의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사무실을 급습해 12명이 사망한 사건은 나흘 뒤 수백만 명의 시민을 길거리에 몰려나오게 만들었을 정도로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같은 해 11월의 ‘파리 테러’와 다음 해 혁명 기념일의 ‘니스 테러’로 이어지면서 민족, 종교, 정치 문제가 뒤섞여 일어난 일련의 테러로 평가됐다. 하지만 ‘샤를리 에브도’ 테러로 희생당한 사망자 명단에 ‘샤르브’, ‘카뷔’, ‘티그누’, ‘오노레’와 같은 풍자 만화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았다. 전 세계의 풍자 만화가들은 자신들이 그린 풍자화나 만화가 검열이나 소송의 대상이 되는 것을 넘어 누군가의 증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계기로 전 세계의 언론 시사 만평가들이 파리에 모여 ‘모든 국가의 언론 만평’이라는 주제로 같은 해 9월에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그 중심에는 2006년 이후 ‘평화를 위한 만화(Cartooning for Peace)’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언론 만평가들의 국제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심포지엄과 협회의 10주년 활동성과를 정리해 『모든 국가의 언론 만평』(갈리마르 출판사, 2016년)을 출간했다. 이 책은 언론 만평의 역사에서부터 언론의 자유와 그 한계에 대한 논의, 제3세계에서의 언론 만평가들의 활동 등을 소개하고 있다. 시사만평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고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그리 세련되지 않은 방식으로 일어나는 우리에게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아 보인다.

유럽에서 풍자화의 역사는 종교개혁과 관련해 16세기에 교황을 조롱하는 그림이 나왔을 정도로 오래됐다. 19세기에는 배 모양으로 변신한 국왕 루이 필립을 통해 동시대인들의 욕구불만과 열망을 담아낸 샤를 필리퐁이 있었고, 「1834년 4월 15일, 트랭스노냉의 거리」의 학살이라는 그림으로 민중봉기의 희생자를 그린 오노레 도미에가 있었다. 『샤를리 에브도』 역시 이와 같은 오랜 풍자화의 전통을 계승한 만평 주간지로 볼 수 있다. 풍자화와 만평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작가와 언론에 대한 탄압과 검열의 역사도 그 만큼 오래됐다. 도미에는 정치 풍자화로 감옥에 수감됐고 프랑스의 월간지 <할복자살>은 드골의 죽음에 대한 풍자로 정간을 당했으며 『샤를리 에브도』에 그림을 기고한 만화가들은 심지어 살해당했다.

다만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화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또 다른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테러의 원인이 정권에 대한 공격이나 기독교에 대한 풍자가 아니라 타종교인 이슬람, 그것도 무함마드에 대한 조롱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의 한계 혹은 관용의 한계와 관련해서 타종교나 사회적 금기도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묻게 된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무함마드를 이미지로 나타내는 것이, 이스라엘인들에게는 홀로코스트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금기시돼 있다. 이 책에서 언론 만평가들 사이에 합의가 가장 이뤄지지 않는 논쟁이 바로 종교를 풍자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다. 말하자면 ‘나는 샤를리다’라고 외칠 수 있는 자유와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부딪치는 셈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프랑스의 통계 인류학자 엠마뉴엘 토드는 『샤를리는 누구인가?』에서 볼테르가 말한 신성모독의 자유는 자신의 종교에 관한 것이지 타인의 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프랑스 내 소수종교이자 사회적 약자인 이슬람에 대한 풍자는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주장을 분명히 한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서 프랑스의 전 문화부 장관 자크 랑은 1789년의 인권 선언 11조,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권리들 중 하나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말하고 글을 쓰고 출판할 수 있다. 단 법에 규정된 경우에는 이 같은 자유의 남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본질적인 규정이 그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자유의 남용’이 무엇이고 그 한계가 어디까지이며 그것을 어떻게 누가 정할 것인가 판단하는 일이다. 우리나라에도 “작가가 그 만평을 게재한 동기, 그 만평에 사용된 풍자나 은유의 기법… 그 만평이 독자들에게 어떠한 인상을 부여하는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법원 규정이 있다. 이 책에서 에콰도르의 만평가 보닐의 “나는 내가 말하는 것에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해석하는 것에 책임이 있습니다”라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아무튼 글이 아닌 한 편의 풍자화와 만평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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