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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희망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 승인 2017.05.0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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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 이덕환 논설위원

북핵과 영토·영해 분쟁으로 동북아의 정세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동북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브렉시트라는 新고립주의를 선택한 영국과 ‘미국 먼저’만 고집하는 패권적 트럼프의 미국에 의한 불안도 심각하다. 굴기를 외치는 중국과 옛 제국의 망령이나 되살리겠다는 일본과 러시아의 방자함도 도를 넘어서고 있다. 뒤늦게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난 국가들이 저마다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 나서면서 국제 평화와 자유무역의 꿈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형국이다.

지금 우리의 형편은 절망적이다. 북핵 문제에서는 왕따를 당하고, 갈등하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는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후진적이고 퇴행적인 정치와 과거의 잘못된 관행과 제도를 고집하는 관료주의에 짓눌려서 미래에 대한 희망은 찾아볼 수가 없는 절박한 위기 상황이다.

졸속으로 치르고 있는 조기 대선도 속이 텅 빈 강정이다. 치졸하고 퇴행적인 네거티브만 넘쳐나는 것이 아니다. 정체불명의 폴리페서들이 음침한 밀실에서 급조해낸 ‘잘 퍼주기’식의 어설픈 空約들도 넘쳐난다. 안보와 국방은 미국과 ‘잘’ 협상하면 되고, 창의적 인재를 ‘잘’ 길러내고, 창조적 첨단 기술을 ‘잘’ 개발해서, 창업을 ‘잘’하면 교육과 경제 문제가 한꺼번에 ‘잘’ 해결될 것이라는 식이다. 고질적인 노령화·청년실업·인구절벽문제는 노인연금·청년수당·출산휴가·보육수당을 ‘잘’ 퍼주면 해결된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과 ‘어떻게’ 협상하고, 인력을 ‘어떻게’ 교육시키고, 첨단기술을 ‘어떻게’ 개발하고, 퍼주기에 필요한 천문학적 규모의 추가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진짜 公約은 찾아볼 수가 없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순진하고 맹목적인 환상도 절망적이다. 과학기술과 ICT를 ‘잘’ 융복합시키면, 인간과 사물이 ‘잘’ 연결되고,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인공지능과 로봇이 사회를 ‘잘’ 이끌어 줄 것이라고 야단들이다. 그런데 초지능·초연결의 꿈을 위해 과학기술과 ICT를 ‘어떻게’ 융복합시켜야 하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잘 살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약관 33세부터 장장 45년 동안 떠들썩한 경제포럼 개최를 生業으로 삼아왔던 클라우스 슈밥이 과연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先知者인지는 분명치 않다.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한다고 우리 모두가 IoT·클라우드·빅데이터·모바일(ICMB)에만 매달려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우리만의 독창적 영역과 기술을 찾는 일이 먼저다. 이제 남이 장에 간다고 반드시 따라가야 한다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한편으로는 창조적 선도자를 외치면서 돌아서서는 남의 제도나 노력을 베끼자는 모방형 추격자의 자세를 고집하는 이중적·패배적 사고방식은 확실하게 버려야만 한다.

불필요한 논란은 과감하게 정리하고, 확인된 문제는 확실하게 해결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교육 문제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의 개혁이 실패했으니 이제는 판을 새로 짜야한다는 학제개편 주장은 의미가 없다. 성공의 보장도 없는 일에 엄청난 비용을 쏟아 붓고, 괜한 혼란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예산으로 사립대의 학생 선발권을 박탈해서 운영하겠다는 행운권 추첨으로 과열된 대입과 학벌주의를 없애겠다는 발상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판박이 인재상을 강요하는 찍기식 짝퉁 수능은 그냥 두고, 청소년의 특권인 방황의 자유까지 앗아버리는 학생부종합전형으로는 고질적인 사교육을 잡고, 진정한 창의적 인재를 양성할 수는 없다. 대학을 맞춤형 교육과 창업의 전당으로 만들겠다는 주장도 격변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정치와 정책 과잉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 이기적인 패거리 문화에 찌들어버린 저질 정치인과 관료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다. 컨트롤타워와 거버넌스가 아니라 人事가 萬事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法治를 위해 정제된 민간의 역량을 키우고, 촛불의 경험을 희망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대학과 공교육을 바로 세워야만 가능한 일이다. 교수들이 남의 탓만 해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희망의 끈은 절대 놓을 수 없다.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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