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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구상한 그들, 산업화·민주화 구분하지 않았다”
“근대화 구상한 그들, 산업화·민주화 구분하지 않았다”
  • 김건우 대전대·국문학
  • 승인 2017.04.2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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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김건우 지음 | 느티나무책방 | 296쪽 | 17000원

책의 제목만 보면, 딱 ‘뉴라이트’ 계열로 오해받기 쉽다. 오해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런 이름을 붙인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 지금의 한국을 설계하고 만든 이들을 이승만,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등 정치가나 자본가에만 국한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 둘째, 오늘날 우익의 이름은 ‘오염된’ 것이며, 한국 현대사에서 우익에 속하는 인물들의 사유와 업적이 무엇인지 명확히 함으로써 우익의 원래 성격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책의 저자 후기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은 2012년 장은수 전 민음사 대표의 권유로 시작됐다. 장은수 대표는 필자의 오래 전 박사논문(『사상계와 1950년대 문학』, 소명출판, 2003)을 잘 알고 있었고 이 논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책을 써볼 것을 필자에게 권한 것이었다. 

필자의 박사논문은 전후 지성사에서 잡지 <思想界>가 가지는 의미를 논구한 것이었다. 특히 <사상계>를 주도한 인물들이 서북(평안도, 황해도) 출신들이며 일제강점기 도산 안창호의 우파 민족주의 계보에 이어진 그룹이라는 점을 입증했다. 그런데 사상계를 이끈 장준하와 1~3대 주간(김성한, 안병욱, 김준엽)이 모두 일제 말기 일본군 학병으로 태평양전쟁에 끌려갔다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문제의식을 촉발했다. 필자로 하여금 ‘학병세대’에 주목하게 했던 것이다. 

 

총괄적으로 이 책은 인물에 대한 열전이면서 ‘세대에 대한 평전’이다. 외국의 경우, 세대를 다루는 평전이 가끔 있다. 국내에도 번역된 68세대에 대한 평전이 예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순수 국내 저서로 세대에 대한 평전은 이전에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방법적으로 새로운 시도다. 

 

학병세대는 1920년을 전후해 태어나 일제 말 제국 최고 수준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해방 후 분단이 현실화되면서 학병세대 역시 남북으로 갈라졌다. 남과 북 어느 쪽을 선택했든 이들이 새 국가 건설에 이바지한 부분은 엄청난 것이었다. 북을 선택한 이들 가운데에는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확립한 황장엽 같은 인물이 있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남쪽을 선택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이뤘는가의 문제였다.

총체적 근대화론자들, 박정희의 ‘기형적’ 근대화 우려

연구 과정에서 필자가 발견한 것은, 초기 한국사회의 근대화를 구상한 사람들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대별해 각각의 역할론으로 설명하는 이들은, 마치 오늘의 대한민국의 뿌리가 둘인 것처럼 바라본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 그러니까 초기 대한민국을 구상한 사람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총체적 근대화를 그리고 있었다. 산업화가 경제적 근대화를 의미한다면 민주화는 정치적 근대화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장준하, 김준엽 등 박정희 정권에 저항한 학병세대들은 ‘근대화’를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박정희 정권과 차이가 없었다. 그들이 문제 삼았던 것은,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가 산업화 일변도로 전개됨으로써 ‘기형적’ 근대화로 흐른다는 사실이었다. <사상계> 그룹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구상과 실천을 책의 4장에서 7장까지 다뤘다.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가 산업화로 현실화될 때, 그 뜻에 동조하고 정권에 참여한 학병세대들이 있었다. 이들을 단순한 극우 보수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은 오늘의 시각에서 바라본 평가일 뿐이다. 당시 정권에 참여하거나 동조한 사람들이 실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살피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한태연, 황산덕, 선우휘 등을 다루는 8~9장이다.

오늘의 한국사회를 이야기할 때 ‘새마을운동’을 빼놓고 가기는 어렵다. 그 공과를 떠나 새마을운동이 한국 사회를 바꾼 사실 자체를 인정한다면, 이 운동의 밑그림은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유래됐는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5·16 군정기 류달영이 이끌던 ‘재건국민운동’은, 그래서 중요하게 살펴볼 지점이었다. 류달영이 원래 구상했던 그림은 무엇이고, 훗날 이것이 어떻게 왜곡됐는가. 그리고, 류달영 구상의 뿌리는 또 누구로부터 비롯됐으며 그 사상적 줄기는 어디에 닿아 있는가. 10~13장에서 다룬 문제였다.

모두 알듯이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남과 북 양쪽에서 중도파는 설 자리를 잃었다. 해방기에 그렇게 많이 존재하던 중도파는, 이후 한국의 역사에서 완전히 궤멸되고 만 것일까. 한국의 현대사에서 이념적 중도파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종교의 형태로 숨을 쉬고 있었다는 것, 이들 학병세대 종교인들이 이념적으로 ‘질식’ 상태에 있던 한국사회에 ‘숨통을 열어준’ 사람들임을 밝히고자 했다. 강원용, 안병무, 문익환 등 김재준의 학병세대 제자들을 다룬 14~15장의 내용이다. 더하여, 가톨릭의 학병세대 김수환과 지학순의 역할도 16장에서 다뤘다. 

‘학문과 사상’의 측면에서, 학병세대 지식인들이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특히 1960년대 일어난 민족주의의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온 것이며 어떤 형태로 사유의 진영을 형성했는가.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던 천관우와, 학자이자 문인이었던 조지훈, 그리고 시인 김수영을 다루는 17~19장의 내용이다. 

‘세대에 대한 평전’ 국내 첫 시도 

총괄적으로 이 책은 인물에 대한 열전이면서 ‘세대에 대한 평전’이다. 외국의 경우, 세대를 다루는 평전이 가끔 있다. 국내에도 번역된 68세대에 대한 평전이 예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순수 국내 저서로 세대에 대한 평전은 이전에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방법적으로 새로운 시도다. 제국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그러면서도 친일의 혐의가 없는 세대, 오늘의 한국을 설계한 세대를 이 책은 이야기하려 했다. 

필자는 국문학자다. 국문학자가 왜 ‘역사책’을 썼는가를 이야기해야겠다. 전통적인 문학 연구의 분야는 작가론, 작품론, 문학사론이다. 2000년대에 들어 문학 연구에 변화가 일었다. 문화연구(Cultural Studies)가 문학 연구 영역에 들어오면서 연구의 대상과 방법 면에서 확장이 일어났다. 이 문화연구는 기존 연구 분야인 작가론, 작품론, 문학사론에 변화를 가져왔다. 

크게 보아 ‘새로운 역사주의’라 할 수 있는 이 방법론은 작가론을 지성사와 문화사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왔다. 전통적인 작가론에서는 사용하지 않을 자료들을 모조리 검토하는 것이 이 방법론의 특징이다. T. S. 엘리어트의 말과 같이, 셰익스피어의 세탁요금청구서가 발견됐을 때 이것이 셰익스피어 연구에 무익하다고 누가 섣불리 단정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등장해 이 ‘자료’를 적절한 자리에 위치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작품론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었다. 과거 문학연구에서 작품론이 작품 해석으로 최종 귀결됐다면, 새로운 작품론은 텍스트를 하나의 ‘징후’로 바라본다. 텍스트를 그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징후로 간주함으로써, 시대의 단면을 재구성하고 ‘이론’이 놓치는 섬세한 시대의 결을 잡아낸다. 문학사론도 마찬가지로 변한다. 이제 문학사는 때로 문화사가 되고 때로 제도사가 되며, 때로는 지성사가 되기도 한다. 

오늘날 문학 연구자들은 타 분야, 즉 역사학이나 사회학, 언론학 등에 대화를 요청하고 있다. 이렇게 물어 본다. ‘한국 지성의 역사’는 어느 분야에서 연구할 주제인가. 그것은 문학도, 역사학도, 사회학도 아닌 ‘한국학’의 주제가 아닐까. 

 

김건우 대전대·국문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문학을 한국학이라는 더 넓은 지평에서 바라보면서, 해방 후 지성사와 문학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상계와 1950년대 문학』, 『혁명과 웃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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