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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신학의 평등 주장한 종교개혁 … 종교의 속박으로부터 '자유' 외치기도
학문과 신학의 평등 주장한 종교개혁 … 종교의 속박으로부터 '자유' 외치기도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4.17 17: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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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4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_ 2강. 이양호 연세대 명예교수의 ‘루터와 칼뱅, 종교개혁과 근대 사회’
▲ 이양호 연세대 명예교수

올해는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다. 로마 카톨릭의 교리에 항거하며 훗날 ‘종교개혁’으로 불리게 되는 행동에 나선 그의 신앙은 오직 ‘믿음만으로, 은혜만으로, 성서만으로!(sola fide,sola gracia, sola scriptura)’라는 말로 함축할 수 있다.
지난 8일(토)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북파크 카오스홀에서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시즌4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강연 시리즈의 두 번째 강연이 바로 이 ‘종교개혁’의 거인으로 불리는 루터와 칼뱅을 조명했다. 이양호 연세대 명예교수의 ‘루터와 칼뱅, 종교개혁과 근대 사회’다. 이번 강연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루터와 칼뱅이 바꾸고자 했던 혁신적 사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 시대에 필요한 종교개혁의 패러다임과 현재적 의미를 짚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양호 명예교수는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영국 옥스퍼드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원장, 한국교회사학회 회장, 한국칼빈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기독교대한복음교회 회장으로 있다. 저서로는 『종교개혁』, 『루터의 생애와 사상』, 『칼빈 생애와 사상』 등이 있고 그밖에 W. J. 부스마의 『칼빈』 등을 번역했다.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사진 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u.net


세는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돼 있었다. 귀족이 있었고 평민이 있었으며, 귀족은 평민을 지배했다. 교회도 종교적 귀족인 성직자가 있었고 평신도가 있었다. 성직과 세속직이 구별돼 있었으며, 성직은 세속직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종교가 정치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달이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하듯이 황제는 교황이 위임해 주는 권한을 행사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교황은 황제를 임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학문에 있어서도 신학이 다른 학문들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은 이런 구조를 부정하고 둘 사이의 평등성을 주장했다. 루터는 “교황, 주교, 사제 및 수도사들은 영적 신분이라 부르고 군주, 영주, 장인 및 농부들은 세속적 신분이라 부르는 것은 순전히 조작적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루터는 두 왕국론이라는 교리로 정치의 자율화를 주장했다. 또한 종교개혁은 종교의 속박으로부터 인류를 자유하게 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만물 가운데서 완전히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또한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수』에서 교회 즉, 교인들이 현재 포로 상태에 있다고 비판하고 교권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했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문예부흥은 통상 페트라르카(1304~1374)로부터 범신론자인 부르노가 처형당한 1600년까지로 잡고 있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루터가 95개 조문을 제시한 1517년부터 30년 전쟁이 끝난 1648년까지로 잡고 있다. 문예부흥운동은 보통 고대 문화의 부흥 운동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우리가 이들 르네상스주의자들과 중세주의자들의 논쟁을 고려해 보면 르네상스는 매우 복합적인 문화 운동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르네상스에는 분명히 그리스 로마 문화를 부흥시킨 면이 있지만 단순히 그리스 로마 문화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독창적인 면이 있으며, 중세 문화와 다른 것 같지만 중세 문화로부터 단절된 것이 아니었다. 또한 르네상스는 뒤를 잇는 종교개혁과 시민혁명과 함께 근대 문화를 시작한 운동이었다.

크게 보면 종교개혁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뮐러(Bernd Moeller)는 “인문주의가 없었더라면 종교개혁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칼뱅은 1532년 『세네카 관용론 주석』을 출판했는데, 이 저작은 칼뱅이 젊은 시절 지녔던 인문주의를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는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러나 인문주의와 끝까지 동행한 것은 아니었다. 1524~5년 에라스무스와 루터 사이에 있었던 자유 의지와 노예 의지 논쟁으로 루터와 인문주의자들이 결별하기 이전부터 루터는 인문주의자들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 인문주의자들은 바울적 교리에 대한 루터의 해석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에라스무스주의적, 심지어 펠라기우스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협동적 의지를 강조했다. 교리 그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도 루터는 인문주의자들과 달랐다. 대부분의 인문주자들은 교리에 대한 관심을 스콜라 신학에로 회귀하는 것으로 봤다. 그러나 루터는 교리를 바로잡는 것이 교회의 생활을 개혁하고 도덕을 바로잡는 것보다 더 우선적이라고 생각했다.

종교개혁과 근대 문화

종교개혁은 근대 문화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루터는 신이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해 고전적 고대를 회복하게 했다고 확고하게 믿었다. 루터는 소년,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그들을 교육시킬 것을 주장했으며, 공중 도서관을 세우되 거기에는 성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고전과 그리스 로마의 고전들을 비치할 것을 주장했다. 이와 함께 그 도서관에는 법률, 의학, 예술 및 과학에 관한 최선의 저서들도 비치하고 또한 역사에 관한 저서들도 비치할 것을 주장했다.

칼뱅은 「창세기」 1:16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문학은 알면 즐거울 뿐만 아니라 매우 유익하다. 이 학예가 신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 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철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참으로 그들[철학자들]이 가르치는 것들이 진실하며, 배우면 즐거울 뿐만 아니라 유익하며, 그것들은 그들에 의해 정교하게 수집됐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을 막지 않는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한껏 높이 평가했다. “플라톤의 견해는 더욱 옳다. 왜냐하면 그가 영혼 안에 있는 신의 이미지를 고려하기 때문이다.”
 
500년 전 종교개혁의 시사점

종교개혁은 무엇보다 神律사회, 神律문화를 지향한 운동이었다. 중세는 교회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의 모든 면을 지배했다. 중세는 한 마디로 타율 사회였다. 여기에 반발하고 나온 운동이 문예부흥운동이었다. 문예부흥운동은 문화의 자율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루터는 문예부흥운동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전적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인문주의자인 로렌조 발라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황에게 서로마 제국을 양도하고 전 세계 교회의 관할권을 주었다고 하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가 위조문서임을 입증했다. 루터는 교황청을 비판할 때 로렌조 발라의 이 비판을 원용했다.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 성경을 출판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성경에 근거해 중세 교회를 비판했다. 예컨대 중세 교회가 사용해 온 라틴어 번역인 불가타에서는 「마태복음」 4장 17절의 예수님 말씀이 “고해 성사를 하라”로 돼 있으나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회개하라”로 돼 있었다. 루터는 그리스어 성경에 근거해 고해 성사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았고, 그래서 성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터는 문예부흥 운동 속에 내재해 있는 세속주의는 거부했다.

부스마는 칼뱅 전기를 쓰면서, 칼뱅 전기는 16세기의 전기라고 봤다. 부스마는 칼뱅은 미궁과 심연을 다 두려워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미궁은 그 안에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이다. 속박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심연은 발붙일 곳이 없이 떨어지는 곳이다. 자유를 넘어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칼뱅이 봤을 때 중세가 미궁의 사회였다면 문예부흥은 심연의 상태였다는 것이다. 부스마가 보기에 16세기는 미궁과 심연과 씨름하는 시대였으며, 칼뱅도 그 두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씨름했으므로, 칼뱅의 초상화는 16세기의 초상화라는 것이다. 부스마는 나아가서 미궁과 심연을 다 극복하는 것이 인류의 문제이므로 칼뱅은 인류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세가 교회가 지배하던 타율의 사회였다면, 문예부흥은 이 타율에 반발하고 자율을 주장하던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타율도 자율도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했다. 그것은 神律사회, 神律문화였다. 신율은 자율이 아니라는 점에서 타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신의 법이므로 타율은 아니다. 신율은 내 안에 있으므로 자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나를 초월하므로 자율이 아니다. 유한한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하여 보편성을 추구할 때, 그는 신율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두 왕국, 또는 두 정부를 주장했다. 결국 그들은 교회와 국가를 구별했다. 교회가 할 일이 따로 있고 국가가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는 중세의 신정 정치의 원리를 거부한 것이었다. 국가의 자율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멈춘 것이 아니었다. 국가는 자율권을 가지지만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국가는 때로는 성직자들의 비판을 경청해야 하며, 무엇보다 형평(equity)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봤다. 여러 사람들이 상호 조언하고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는 백성이 관리를 선거로 선출하고 관리는 법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정치 제도라고 주장했다. 루터는 제후들의 저항권을 주장했고, 칼뱅은 의회의 저항권을 주장했으며, 익명의 칼뱅주의자는 민중 저항권을 주장했다. 칼뱅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선호했지만 민주주의가 선동가들의 선동에 의해 잘못된 길을 가지 않을까 염려했다.

종교개혁은 무엇보다 종교의 개혁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를 주장했다.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은혜로 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한 공로가 배격됐다. 중세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얼마나 종교적 노력을 했는가. ‘오직 은혜’는 종교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다. 종교가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종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종교개혁자들은 생각했다. 이제 종교적 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은 자기의 직업을 통해 이웃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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