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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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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연도 중앙대 교양학부·철학
  • 승인 2017.04.0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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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이연도 중앙대 교양학부·철학
▲ 이연도 중앙대 교수

사진작가 로베르 두아노가 찍은 「파리 시청 앞 광장에서의 키스」라는 작품이 있다. 그의 사진은 스토리가 있는 게 특징인데, 2차 세계대전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찍은 이 사진엔 사랑하는 연인의 열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두아노는 이 사진이 실제 장면을 포착한 것이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 40여년이 지나 밝혀진 사실은 사진 속의 연인은 일당을 받고 고용된 모델들로 확인됐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재원 옮김, 이후, 2004)에서 이 사진이 연출됐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분통을 터트린 사람들의 모습에서 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 사진작가가 사랑의 장면을 재빠르게 포착해 내는 스파이가 돼주기를 바라는 열망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진을 ‘실제’를 기록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역사의 증거가 된 대부분의 사진들은 사실 ‘재현된’ 것들이다.

수업에서 『타인의 고통』을 읽기 교재로 사용하는데, 최근 흥미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아노의 이 사진을 보여주고, 첫 인상을 물어보면 대개 반응은 “낭만적이다”, “부럽다” 등이다. 사실 이 사진은 모델을 고용해서 찍은 사진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일반적으로 예상되는 답은 ‘실망할 것이다’가 될 터인데, 요즘 학생들의 반응은 의외다. 상당수의 학생들은 이 사진이 연출됐다는 사실을 알아도, 여전히 ‘멋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셀카’를 찍으면서 ‘얼짱’ 각도를 고민하고, 개인 블로그에 올린 사진을 보정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사진의 연출이나 조작에 무감각하게 반응한다. 연출된 이미지에 익숙하고, 그 것을 당연시 여기는 세대인 것이다.

예술적 감수성을 기르기 위한 기본적 조건 중의 하나는 자연과의 교감이다. 봄날, 대지는 생명의 약동을 절로 느끼게 한다. 산과 들엔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바다의 파도도 따스한 바람을 품고 있다. 대학에 갓 입학한 학생들에게 답답한 강의실을 벗어나 맨땅을 밟고 가까운 공원이라도 산책하길 권하는데, 간혹 게임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는 게 스트레스 해소에 훨씬 좋다는 대답을 듣는다. 아직까진 여행을 하거나 자연을 경험하는 게 좋다는 학생들이 많긴 하지만, 해가 갈수록 ‘실제’보단 가상의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에겐 자연 역시 대상화된 이미지일 뿐, 굳이 직접 접촉해야 할 필요성이 없다.
 
이제 우리들은 본격적으로 두 종류의 공간에서 살고 있다. 넓이와 物性을 지닌 실제 공간과 정보로 구성된 인공지능적 공간. 빌렘 플루세르(1920~1991)는 “우리의 환경은 근래에 이르기까지 사물들로 이뤄져 왔다. 집과 가구, 기계와 운송수단, 옷가지와 세탁물, 책과 그림, 통조림 깡통과 담배들로 채워졌다. 그런데 사정은 달라졌다. 현재 기형적인 물건들이 도처에서 우리 주변으로 밀려들고 있다. 그것들은 일상의 사물들을 밀어낸다. 우리는 이런 기형적인 물건들을 ‘정보’라고 부른다”고 했는데, 이제 그의 예견은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다(빌헬름 슈미트,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장영태 옮김, 책세상, 2017). 이제 정보라는 가상의 공간은 실제를 위협하고, 때론 실제보다 더 구체적인 감각으로 다가온다. 역사 유적지나 박물관엔 VR(Virtual Reality) 기기가 비치돼 있다. 때론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증강현실’을 경험하기도 한다. 실제와 가상이 뒤섞인 상태에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어디서부턴 가상인지 그 경계조차도 모호해 진다.
  
학생들에게 고전 읽기를 강조하는 이유는 삶에서 부닥치는 선택의 고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인데, 이미지에 익숙한 세대는 행간의 세세한 떨림이나 울림의 중요성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그 전체적 이미지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책 읽기와 상상력의 필요성을 얘기하는 선생의 말은 공허하게 들릴 것이다. 통제되지 않은 정보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무서운 이유다.

빌헬름 슈미트는 우리 시대 ‘정보 관리’는 여전히 주체 자신의 몫으로, 정보와 통신이 한도를 넘어설 때 그 양을 줄이고 성찰의 공간을 다시 획득하는 것은 삶의 의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인데, 정보와 통신의 잠재적 가능성이 확장되고 있는 현실에 비해 자기 성찰의 현실적 공간은 눈에 띄게 좁아지고 있다. 이미지의 폭격 속에서 ‘실제’를 사수하기 위한 노력은 의미 없는 것일까. 두아노의 작품이 연출됐다는 사실을 알고,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전 이 사진이 ‘의미’없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실제로’ 사랑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이연도 중앙대 교양학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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